“검정고무신 신고 돈 모으자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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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고무신 신고 돈 모으자고 했어”
  • 이재표 청주마실 대표
  • 승인 2016.03.30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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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사랑방서 태동한 성동신협 발기인, 오병찬 씨
자산 350원서 1400억원…조합원 1만3000명으로 성장

토박이 열전(2)
이재표 청주마실 대표

▲ 오병찬 씨./ 육성준 기자 eyeman@cbinews.co.kr

청주시 서원구 성화개신죽림동 주민센터가 있는 장전(長田)방죽 인근을 ‘진밭재’라 부르던 시절, 집안의 대들보인 큰형은 서울대에 입학했다. ‘집안에서 한 명만 공부시키면 된다’는 공식이 통하던 시절이었다. 오병찬(77) 씨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농사일에 투입됐다. 논밭을 가는 것이 농사의 전부인 줄 알았던 당시에 축산이나 원예는 선진농업이었다.

검정고시로 고교졸업장을 따낼 만큼 도전적이었던 오 씨는 선진농업을 배우러 서울 ‘선린촌(善隣村)’을 찾는다. 선린촌은 강동구 둔촌동과 길동에 걸쳐있던 마을인데, 1955년 최문환 목사가 피란민, 도시빈민 등을 모아서 만든 자활촌이다. 오 씨는 이곳에 설립돼 있던 신협(신용협동조합)에 주목했다. 선린촌은 사라졌지만 선린신협은 지금까지 남아있다.

“독일과 캐나다 등에서 신용조합을 들여온 사람이 메리 가별(가브리엘라) 수녀였어. 1960년 부산의 성가신협이 국내 1호였지. 선린촌에도 신협이 있었는데 그 신협을 보고 우리 동네에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거요.”

1965년 3월20일 진밭재에 사는 일곱 명이 모여 성동신협을 만들었다. 10대부터 30대까지 청년들이었다. 오씨는 당시 26살이었다. 똑같이 50원씩을 내서 모두 출자금 350원을 모았다. 한 사람이 낸 50원의 가치는 지금 어느 정도일까? 당시 쌀 한가마(80kg) 가격이 3300원 정도인데 지금은 25만원 안팎이니 당시 50원이라야 현재 4000원만도 못한 돈이다. 그야말로 십시일반이었던 셈이다. 당시 성화동이 얼마나 궁벽한 농촌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일종의 농촌부흥운동이었지. 푼돈을 모아서 저축하자고 했어. 흰 고무신 신을 거, 아껴서 검정 고무신을 신자고 했지. 허리춤에 주머니를 만들어 차고 다니면서 동전을 따로 모으게 하고 우리는 그렇게 모은 10원짜리 동전을 받았던 거야.”

▲ 1965년 당시의 장부.

신협이라고 건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오 씨의 사랑방이 13년 동안 성동신협이었다. 개인별 원장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장부 한 권에 모든 것을 적어 내려갔다. 1978년은 뜻 깊은 해다. 길가에 있는 한 평반짜리 이발소 옆에 첫 사무실을 냈기 때문이다. 1년 내내 공동으로 새끼를 꼬던 장소였다. 이때 여직원도 한 명 고용했다. 1979년에는 재무부의 인가를 받아 법인으로 등록했다.

1982년에는 자체 회관을 지었다. 지금은 성화주공 4단지 속에 묻혀버린 성화동 37번지다. 그 자리에 있던 가옥을 철거하고 22평 단층 건물을 지었다. 동네 조합원들이 모두 나와 부역을 했다. 1982년이면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던 시절이지만 그때 사진을 보면 바지저고리에 고무신을 신은 사람들이 보인다. 굴삭기 대신 가래질로 땅을 파서 기초를 다졌다.

1.5평에서 22평으로 성장했으니 열다섯 배에 가까운 성장이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오 씨의 옛집이나 첫 사무실 자리, 단층 건물이 있던 자리는 모두 아파트단지로 개발돼 흔적을 찾을 길 없다. 다만 당시의 성동신협은 현재 개신동 691번지로 옮겨 1지점이 됐다.

그렇다면 본점은 어디로 갔을까? 지금은 택지개발로 개신·성화동이 상전벽해가 됐지만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개신동의 중심은 사창동과 연접한 충북대병원 앞이었다. 1990년 12월 개신삼익아파트에 740세대가 입주하는 것을 따라 1991년 9월2일 개신동 2-10번지로 본점을 옮겼다. 현재는 본점과 1지점 외에도 성화동 주민센터 앞 성동교회 1층에 2지점까지 3개의 점포가 있다. 350원이던 자본금은 1400억원으로 늘었고, 조합원은 1만3000명에 이른다. 다행스러운 것은 1965년 출범 당시의 장부와 1982년 회관 건립당시의 사진 등이 1지점 서고에 남아있어 지난 발자취를 아련하게나마 짚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 1982년은 첫 사옥이 건립된 해다. 한복, 군복을 입은 조합원들이 건립에 손수 참여했다. 흑백사진은 준공된 단층 건물.

오 씨는 신협 일을 하면서도 축산업을 계속했다. 신협 일을 해도 월급을 챙길 수 없으니 소를 길러 생활을 한 것이다. 죽림동 인근 남이면 석판리에 있는 오 씨의 집은 청기와 2층에 마당에는 세를 준 공장이 있었다. ‘14살부터 지게질을 시작했다’는 오 씨는 38년 동안 축산업에 종사했고 무려 43년을 신협에 바쳤다. 70살을 앞둔 2008년 그는 모든 일선에서 물러났다.

성동교회 장로이기도 한 오 씨는 최근 색소폰에 빠져 지낸다. 2년 전부터 ‘그리심산’이라는 색소폰 동호회에 가입해 1주일에 하루 연습을 하고 불러주는 곳을 찾아서 무료공연을 다녔다. 현재는 교회 수요예배에서만 공연을 한다.

“택지개발로 집이 편입되면서 이곳으로 올 때는 성화개신죽림동인줄 알았는데 여기는 주소가 청원군 석판이더라고. 그래도 그때는 다 한동네였어. 통합이 됐으니까 이제 여기도 청주시고…. 평생을 태어난 데 안 떠나고 고향에 살았다는 게 행복한 거지, 뭐.”

사람들은 대개 고향을 말할 때 시·군을 얘기한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그냥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가 고향이라고 퉁쳐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의 고향은 청주가 속에서도 ‘성화동 진밭재’다. 그리 보면 요즘에는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고향을 정확히 짚을 수 사람이 아주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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