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책에는 오늘날 서적에서 볼 수 없는 옛 책만의 아름다움이 행간마다 숨어 있다. 금속활자를 만들고 먹물을 묻혀 활자를 찍어내고 책표지를 아름답게 만들고, 제본하기까지 모든 과정이 하나의 예술이고 장인의 구도적 자세다.

 책 표지는 두툼한 한지를 겹쳐 그 안에 여러 가지 아름다운 무늬를 새겨 넣었다. 능화판(菱花板)은 보자기, 이불보, 책표지 등의 문양내기에 사용된 무늬 목판인데 특히 책표지 무늬 넣기에 많이 사용되었으므로 능화판 하면 책표지 무늬판으로 통용되어 왔다.

 능화(菱花)는 책표지 무늬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무늬로 연못의 넝쿨 마름 꽃을 일컬음이다. 책표지에는 연꽃무늬, 봉황무늬, 풀잎무늬, 번개무늬, 귀갑무늬(거북등 무늬), 만자무늬(卍) 등 수없이 많은 전통문양이 등장하나 기본이 되는 무늬는 역시 능화무늬이다.

 고서의 표지를 언뜻 보면 별 문양이 없는 장판지 같으나 관심을 가지고 속을 들여다보면 기기묘묘한 갖가지 무늬가 숨어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능화판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가는 확실치 않지만 현재까지 가장 오래된 능화판 표지는 고려 희종 5년(1209)에 간행된 서전대전도(書傳大全圖)이다. 이 책 표지에는 연당초(蓮唐草) 무늬가 화사하게 새겨져 있다.

 조선조로 접어들며 능화판은 책 간행에 있어 보편적으로 적용되었다. 2004청주직지축제 기간동안 청주고인쇄박물관에서는 ‘옛 책의 아름다움’ 특별전이 열렸는데 여기서 특별히 관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옛 책의 능화판이다.

 우암 송시열의 시문집으로 사후에 교서관에서 발간한 우암선생문집(尤庵先生文集)은 연꽃, 구름, 격자문(格子門:문틀무늬)이 새겨져 있다. 유교경전의 하나로 효도의 기본서가 되는 효경을 한글로 번역한 효경언해(孝經諺解)는 초록색 바탕무늬에 먹색의 원형 꽃무늬 5개가 단순하게 배치되어 있다.

 20세기 초에 간행된 전주이씨파보(全州李氏派譜)에는 나비 문양이 등장하며 조선말 박신지(朴身之)의 시문집인 소호선생문집(小湖先生文集)에는 거북으로 추정되는 동물 문양이 선사시대 암각화처럼 상징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선조때 주역 원문에 토를 달고 한글로 직역한 주역언해(周易諺解)는 격자문 바탕에 고려시대의 와당이 등장한다. 둥근 모양의 와당(마구리 수키와)은 연꽃 잎 숫자가 통일신라시대 8개에서 고려로 접어들며 12개로 늘어난다.

조선 중기에 간행된 민업(閔嶪)의 시문집 양호유고(楊湖遺稿)에는 용무늬가 과감하게 묘사되어 있다. 용의 발톱도 5개나 된다. 중국에서는 황제의 상징으로 용의 발톱을 5개씩 묘사했으나 조선에서는 3~4개 밖에 그리지 않았는데 이 문집에서는 이례적으로 5개의 용 발톱이 등장한다.

왜 이렇게 표지 장정에 능화판이라는 무늬를 새겨넣은 것일까. 첫째 이유는 책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미의식이고 둘째 이유는 능화판 역시 문자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직지축제 현장에서는 무형문화재 배첩장 홍종진씨에 의해 능화판도 재현되었다. 능화판 위에다 밀랍을 칠한 다음 물기를 머금은 두툼한 책 표지를 얹고 정성껏 문지르면 격자문 등 전통의 문양이 배어 나온다.

이를 책표지로 하여 중국의 4번 꿰매기와 달리 5번 꿰메기라는 이른바 오침장정법(五針裝幀法)으로 책을 제본한 것이 우리 옛 책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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