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스트 권구현 시인을 찾아서 1

충북 근대문학의 요람을 찾아서(2)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추풍령에 왔습니다. 충북의 남단, 영동군 추풍령면과 김천시 봉산면을 잇는 고개입니다.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 가는 추풍령 구비마다 한 많은 사연……” 하는 옛 노래를 당신은 들어보셨던가요? 추풍령은 옛날부터 조령(문경새재), 죽령과 함께 험준한 백두대간을 넘는 주요 통로로서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 충북의 남단인 영동군 추풍령면과 김천시 봉산면을 잇는 고개로 조령과 함께 백두대간을 넘는 중요 통로였다.

오늘날에도 경부고속도로와 경부고속철도, 4번 국도가 지나는 길목인데, 노랫말을 들으면 까마득히 높은 고개일 것 같지만 실상은 해발 221m의 야트막한 고개입니다.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고개를 넘는 줄도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일 만큼 존재감이 미약합니다. 물론 옛날에는 길고 험한 고개였을 것이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새였을 테지요.

길은 한 줄기일지언정 양방향입니다. 왕명은 지방으로 내려가고 장계는 한양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길의 형식은 수평이지만 내용은 수직적입니다. 결국 모든 길은 한양으로 향합니다. 대통령의 권한이 왕에 못지않은 오늘날에도 사정은 매일반입니다. 임진왜란 때 부산에 상륙한 3개 선봉대 중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지휘하는 1만여 왜군이 추풍령을 넘을 때도 목적지는 역시 한양이었습니다. 조령을 넘는 다른 부대와 ‘한양 먼저 차지하기’ 게임을 하는 중이었으니 마음이 급했겠지만, 장지현이 이끄는 2000여 의병이 시체로 산을 쌓고 피로 내를 이루어 막았으므로 침략군은 서둘러 진군할 수 없었습니다.

추풍령과 이웃하여 906번 지방도가 지나는 괘방령이란 고개가 있습니다. 인근 주민들은 ‘괘뱅이’라고 부르더군요. 추풍령이 관로(官路)라면 괘방령은 장사꾼들이 이용하는 상로(商路)였습니다.

조선 시대 영남의 유생들이 과거 보러 한양 갈 때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낙방한다는 속설 때문에 추풍령 대신 괘방령을 이용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괘방령의 ‘방(榜)’자가 합격자 발표 때 붙이는 방과 같은 글자이니 혹했을 만도 하지요. 관직도 이름도 없이 추풍낙엽처럼 몸을 던진 의병들, 추풍을 피해 일편단심 한양으로 향했던 유생들을 생각합니다.

의병들이 패할 것이 분명한 싸움에 뛰어들어 목숨을 바친 마음과 유생들이 관직을 얻어 국가경영에 참여할 꿈을 안고 임금의 부름에 응한 마음은 같은 종류일까요? 충(忠)이란 무조건적 추종이나 맹종이 아니라 ‘치우침 없는[中] 마음[心]’이라며 의미 왜곡을 경계하던 당신의 말을 되새겨 봅니다. 권구현 시인을 찾아가는 길, 의병들의 혼이 발길을 붙들어 뜻밖에 한참 머물렀습니다.

영동은 동쪽으로 경북 김천·상주, 북쪽은 충북 옥천, 서쪽은 충남 금산, 남쪽은 전북 무주와 접하고 있습니다. 3개 도의 접경을 이루는 산이 삼도봉(三道峰)인 것도 재미있는데, 해마다 10월에 영동·김천·무주 3개 시·군 주민들이 삼도봉 정상에 모여 지역 간 화합과 우정을 다지고 공동 발전을 기원하는 행사를 30년 가까이 개최해 왔다고 하는군요.

험준한 산에 기대어 살아가는 백성들의 소박하고 속절없는 소망을 가늠해 봅니다. 그날 그 순간만큼은 중앙의 속박에서 벗어나 구름 같은 마음들이었으리라 생각하니 걸쭉한 탁배기 한잔이 간절해집니다.

당신도 미루어 짐작하겠지만, 영동은 산이 많고 평야가 적은 까닭으로 표고버섯 같은 특용작물과 감, 포도 등의 과실농사가 주류를 이룹니다. 곶감은 영동 특산물로 전국에 그 명성을 떨친 지 오래되었고, 최근에는 영동산 포도와 포도주가 새로운 명물로 이름을 얻었습니다.

토지가 척박했던 옛날에는 메밀농사가 많았는데, 고갯마루가 메밀꽃으로 온통 새하얘서 추풍령을 일명 백령(白嶺)으로 부르던 시절도 있었다고 합니다만, 이제는 그 일대뿐만 아니라 영동지역의 밭들이 모두 포도밭이거나 사과밭·복숭아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과일의 고장이 되었습니다.

▲ 여말선초의 학자이자 난계 박연 선생의 사촌형인 박흥생의 시비. 황간면 우매리 반야사 입구에 건립돼 있다.

조선시대 악성(樂聖)으로 꼽히는 난계 박연을 배출한 땅이므로 영동은 국악의 고장으로도 자부심이 높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소리꾼 김용우나 우리나라 ‘해금계의 디바’로 불리는 정수년이 영동 출신인 것도 우연은 아닌 모양입니다. 황간면 백화산 아래 석천계곡 물가에 앉은 반야사에 여말선초의 학자이며 난계의 사촌형인 박흥생(1374~1446)의 시 <반야사에 와서 묵으며>를 새긴 시비(詩碑)가 있어 읽고 갑니다.

“절에 와 묵은 지 오랜데 /집 생각 전혀 안 나네./산빛에 물든 자리 푸르고/대그림자 성글게 발에 어렸다./맑은 물소리 골짜기에 그윽하고/푸른 하늘엔 흰 구름 두둥실 /스님은 이미 공부를 마쳤는데/읽던 책 상위에 남았구나.”

▲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현장인 노근리 쌍굴다리 주변에 조성된 노근리평화공원 내에 건립된 기념관. 양민학살의 진실과 참상을 알리고 희생자를 추모하며 인권과 평화 의식을 고취하는 역사교육의 장이다.

백두대간을 이루는 산들과 맑은 계곡이 어우러져 발길을 붙드는 절경이 많은 영동입니다만, 황간면 노근리평화공원이야말로 그저 지나칠 수 없는 곳입니다. 대한민국을 이보다 여실하게 보여주는 공간이 또 있을까요? 한국전쟁 때 노근리를 지나는 경부선 철로와 철교 아래 쌍굴다리에서 벌어진 미군의 양민학살은 이제 세상이 다 아는 일이 되었습니다.

‘우발적(?) 사고에 대해 유감’이란 말로 책임을 회피하는 미국 정부의 태도도 얄밉지만 피해자들의 진상규명 노력을 수십 년 동안 묵살·은폐하고,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난 후에도 어떻게든 축소하고 의미를 희석한 우리 정부의 노력(?)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수모를 겪으며 ‘지금 우리가 지켜내고 있는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달아야 하는 마음은 참담합니다.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데 도화선 역할을 한 것이 유족인 정은용 씨가 펴낸 소설인데, 실화를 허구로 써야 했던 형편은 그 자체로 비극이었습니다. 만약 그런 현실을 외면하고 ‘문학의 힘’만 강조하며 우쭐한다면 그것을 온당한 평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딱한 역사의 길을 따라 양강면 산막리로 향합니다.

이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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