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세평/ 곽명준 유성기업 노동자

▲ 곽명준 유성기업 노동자

노조파괴가 진행중인 유성기업 영동지회 조합원들은 3월 17일 그날도 아침 출근선전을 위해 출근시간 보다 이른 7시 40분부터 공장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노조 출근선전전은 해수로만 5년째 진행 중이다.

회사가 노조 출근 선전전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회사 임원과 관리직까지 뒤섞여 있는 풍경은 이제 낯설지 않다.

통근버스가 도착하고 선전전을 마무리하고 간부들이 모여 노동조합의 간단한 전달사항을 공유하고 있을 무렵 막내조합원이 울며 뛰어왔다.

“큰일 났어요. 광호형이 죽었어요.” 모두들 그 순간 귀를 의심하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노조임원과 간부들이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노동조합은 사실 확인을 마치고 조합원들은 일손을 놓고 장례식장으로 모이라고 했다.

故 한광호 노동자는 3월 14일 회사의 징계위원회 사실조사를 앞두고 연락이 두절 된지 3일째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조합원들은 직감했다. 이 죽음은 유성기업에 의한 명백한 타살이며 5년째 이어온 노조파괴와 탄압에 굴복하기 싫었던 故한광호 조합원의 마지막 저항이자 투쟁임을 부정 할 수 없었다.

현대차와 유성기업, 창조컨설팅이 기획한 노조파괴가 시행된 2011년 5월 18일 직장폐쇄 이전의 한광호 조합원은 평소 부끄럼이 많아 노조에 활동적이지 않았다. 묵묵한 성격으로 속마음을 잘 보여주지 않는 조합원이기도 했다.

하지만 직장폐쇄이후 20년 청춘을 받친 회사에 대한 배신감과 힘들어하는 동생들을 위해 간부 활동을 자청하며 2년 여간 대의원 활동을 하며 현장을 책임감 있게 이끌었다.

일상적으로 진행되는 관리자들의 감시와 통제, 어용노조와의 차별, 납득 할 수없는 임금 삭감등에 분노한 조합원들이 회사에 항의를 할 때 그는 항상 앞장섰다. 대의원으로의 책임감이었는지, 형으로써 동생들을 지키려 했는지 그는 항상 앞장서서 항의하고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회사는 잘못을 시인하거나 시정하지 않고 故 한광호 대의원을 비롯한 많은 조합원들에게 징계와 고소고발을 남발했고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개인신상 보호를 위해 공개하지 않아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유성기업 노동자 정신건강 실태조사에서 '고위험'에 노출되어 있던 그에게 징계와 고소는 치명적인 위협이었을 것이다. 이미 친형과 절친한 친구가 '해고자'가 된 상황에서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아침에 눈뜨면 밀려드는 출근에 대한 중압감을 회피하는 것은 곧 회사로부터 도망치는 것이었고 결국 출근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회사는 알고 있었다.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할 정도로 심리상태가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는 유성기업 노동자 누구에게라도 발생 될 예견된 비극이었다.

하지만 지난 5년간 단 하루도 멈추지 않은 유성기업의 탄압이 故한광호 조합원을 죽음으로 몰았고, 그는 목숨을 받친 마지막 저항을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경고의 메세지를 유성기업에 던진 것이다.

이제 산자들에게 남은 숙제는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지 않도록 여기서 이 싸움을 끝내는 것이다. 더 이상의 비극을 막기 위해 노조파괴 행위는 ‘여기서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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