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격외도리/ 한덕현 발행인

▲ 한덕현 발행인

역시 우리나라 정치에는 감동이 없다. 만약 김종인이 자신의 당초 공언대로 끝까지 살신성인의 모습으로 일관했다면 아마도 지금쯤은 20대 국회의 여소야대 가능성까지 점쳐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김종인의 비례대표 몽니는 그에게 큰 정치인다운 감동을 바랐던 야당 지지자들에겐 곧바로 충격이었다.

새누리당의 유승민 공방으로 잠시 방향감각을 잃었던 보수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김종인 파문을 빌미로 더민주당을 난도질하고 있다. 당연히 그동안의 김종인 효과도 이젠 가물가물해졌고 오히려 갈길 바쁜 더민주당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김종인의 비례대표 2번은 그야말로 요즘 유행하는 ‘신의 한 수’다. 시쳇말로 고스톱판의 ‘자뻑’이나 다름없다. 처음엔 불리한 분위기를 위장하다가 곧바로 일거양득을 노리는 묘수와 같다는 것이다. 본인은 노욕(老慾)이라는 말에 발끈하며 사퇴의 배수진을 쳤지만 사실 김종인의 비례대표 2번 셀프공천은 전략적인 발상이라고 봐야 한다. 자신의 결정이 어떤 파장을 몰고 오는지를 처음부터 예단하고 밑밥을 던진 이른바 계산된 행위라는 것이다. 결국 그는 갑자기 총선의 포스트 인물로 부상한 것만으로도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그가 당의 설득으로 마지못해 당무복귀를 한다 하더라도 당장 두가지 전리품을 확보한다. 완벽한 금배지와 당에 대한 확실한 장악력이다. 문재인은 물론이고 그의 외인부대랄 수 있는 조국 문성근 진중권 등이 납죽 엎드린 것만 봐도 76세 노구의 기막힌 한 수가 어떠한 폭발력을 가지는 지는 가히 가늠하고도 남는다. 비례대표 2번이라는 자리가 문재인과 사전 교감된 것이든 아니든 지금에선 별 의미가 없다.

어차피 김종인은 자기정치를 하는 사람이다. 전두환 신군부의 국보위 참여와 2억원 뇌물수수로 인한 옥살이 전력은 차라리 논외거리다. 사람들이 이럴 때 전가의 보도처럼 들이대는 ‘당시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다면 더 이상 할말이 없다.

하지만 이번 20대 총선을 포함해 오로지 비례로써만 무려 5선을 기록하는 정치이력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쉽게 생각해도 정치의 생물속성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없다면 보수와 진보를 넘나들며 비례대표를 다섯 번이나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그는 박근혜 안철수 등 자신이 섬겼던 주군을 버리는데도 크게 개의치 않을 정도로 자기정치에 능하다. 유승민이 주군에 대한 단 한번의 배역으로 정치적 유배를 당하는 현실과는 크게 대조되는 것이다.

선거는 프레임의 전쟁이라고 했다. 말 그대로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틀’을 설정해 놓고 이를 견인하며 표를 호소하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의 20대 총선 프레임은 당연히 친노패권 청산과 중도보수층 껴안기다. 이는 더민주당이 아니라 국민과 여론이 제시한 가이드라인이고 이에 충실하고자 문재인은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지금 문재인과 더민주당은 선거의 프레임을 견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프레임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김종인이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다. “내가 당을 떠나면 당이 제대로 돌아갈 것같으냐”는 으름장은 상대의 패를 훤히 내다보고 내던진 승부수나 다름없다. 이로써 문재인이 한발만 움직여도 ‘친노패권의 부활’로 매도되는 현실은 다름아닌 더민주당을 기사회생시키겠다고 나선 김종인이 더 확실하게 다져놓는 꼴이 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문재인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세상 어떠한 일에도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쉽게 잊혀지게 마련이고 이러한 냉혹함은 정치에서 가장 심하다. 정치에선 국회의원 배지를 다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괴리가 천양지차라는 것이다. “내가 원내로 진입해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김종인의 말은 백번이라도 옳다. 정치인들이 기회만 되면 자가발전하면서까지 악착같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문재인은 국회의원 배지는커녕 총선에서 아무 역할도 못할 판이다. 아직은 안한다는 것이 맞겠지만 이런 공백은 정치인으로선 치명타다. 구원투수를 내세워 경기를 이기게 되면 스타로서의 찬사는 선발로 나섰던 에이스가 아닌 당연히 구원투수에게 돌아간다.

이번 비례대표 파문을 놓고 언론들은 김종인이 토사구팽당한다고 호들갑이지만 실은 문재인이 그 처지가 될 수 있다. 문재인이 자기 사람을 대거 총선후보로 심었다고 해서 지금까지 누려왔던 대권주자 위상을 그대로 확보할 것이라고 여긴다면 큰 착각이다. 김종인의 영입은 문재인에겐 어쩔 수 없는 부하(負荷)가 된다. 이미 더민주당의 간판은 문재인과 김종인이라는 두 개의 인물로 나뉘었다.

지금까지 문재인은 지지자들의 ‘지키기’로 커 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 스스로가 먼저 지지자들을 지켜야 하고 그러러면 이제 움직여야 할 것이다. 노무현은 식을 줄 모르는 정면돌파의 투쟁력으로 대통령이 되었고 이명박은 현대의 기적을 내세운 밀어붙이기로 무장해 대권을 거머쥐었으며, 박근혜는 비록 선거의 여왕이라는 폄훼를 받을망정 한강둔치의 허허벌판에서 운동화끈을 질끈 매는 결기로써 권좌에 올랐다. 그렇다면 문재인은? 위기는 기회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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