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목마른 새끼 양이 골짜기의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때 커다란 이리가 나타나 “여기는 내 땅인데 물을 흐리게 하는 네놈은 누구냐”고 호통을 칩니다. 새끼양은 이런 저런 말로 변명을 하면서 아래쪽으로 내려가 물을 마시겠다고 사정을 합니다. 그러나 이리는 막무가내로 눈을 부라리면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끼 양에게 “작년에 내 험담을 한 놈이 바로 너지?”하고 트집을 잡습니다. 새끼 양이 “저는 그 때 태어나지도 않았는데요”라고 말하자 “그렇다면 네 형인지 엄마인지, 하여간 너의 집안 식구임에 틀림없어”라고 억지를 부립니다. 그리고는 새끼 양을 숲 속으로 끌고 가 잡아먹고 맙니다.
이 이야기는 17세기 프랑스의 고전파 서정시인이었던 라퐁텐 의 우화집에 나오는 ‘이리와 새끼 양’의 줄거리입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렸다던 태양왕 루이14세 치하에서 귀족과 성직자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힘없는 민중의 삶을 우회적으로 그린 이 작품은 ‘가장 힘센 자의 말은 언제나 옳다’는 명언으로 오늘에 전해져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있습니다.
올 2002년은 아마도 지구촌 곳곳이 포연(砲煙)으로 자욱할 듯 싶습니다. 부시 미국대통령이 2002년을 ‘전쟁의 해’로 선포하면서 이미 전운(戰雲)은 도처에서 감돌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부시대통령은 지난해 미국 테러응징을 빌미로 아프가니스탄을 쑥대밭으로 만든 뒤 여세를 몰아 테러세력 색출을 위해 계속 전쟁을 벌이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상황이고 보니 어차피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소련의 해체로 이미 슈퍼파워의 초강대국이 된 미국은 그 어떤 나라 건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강자의 논리로 위세를 내세우며 힘을 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기야 세계역사 5천600년 에 전쟁이 없었던 해는 불과 290년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전쟁은 해마다 어딘가에서 일어났고 또 이어 졌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합니다.
전쟁은 질병 기아 마약과 함께 인류의 4대 공적(公敵)이라고 합니다. 그런 전쟁이 초강대국 미국 대통령에 의해 다시 천명이 되고있으니 미국은 평화의 사도인지 아니면 무엇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표적으로 삼는 나라들이 이라크 수단 쿠바 북한 같은 소위 ‘불량국갗들이 분명한 만큼 우리가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아니할 말로 전쟁의 불똥이 한반도로 튀는 것은 아닐 까? 상상만 해도 등에 진땀이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것은 언제고 전쟁을 일으키는 이들은 한결같이 ‘정의를 위해’ 전쟁을 한다고 떠벌린다는 점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살육하면서 그것이 정의를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넌 센스 입니다. 그야말로 ‘이리와 새끼양의 이야기’에 다름 아닌 궤변입니다.
최근 출간된 노암 촘스키의 ‘불량국갗는 ‘이라크와 같은 나라들이 불량국가가 아니라 국제질서 위에 군림하면서 멋대로 국제규범을 무시하는 오만한 미국이야말로 국제사회의 불량국갗라고 역설합니다. 이 책이 미국에서 파문을 일으키고 전 세계의 공감을 얻고있는 것은 시사하는바 크기 때문입니다. 작은 나라들이 미국에 복종하지 않으면 불량국가이고 미국이 그 작은 나라를 치는 것은 정의의 전쟁이라고? 역시 억지요, 강자의 논리입니다. 미국은 절대선(絶對善)이 아닙니다.
옛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전쟁을 좋아하는 나라는 전쟁으로 망한다’고요. 21세기에 미국이 할 일은 전쟁을 일으키는 일이 아니라 전쟁을 막고 전 세계인류의 평화를 보장하는 일이 아닐까요. 그럴 때 미국은 테러의 대상이 되지 않고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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