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문학의 요람을 찾아서’를 시작하며

충북 근대문화의 요람을 찾아서(1)
류정환 시인, 충북작가회의 

오랜만입니다. 당신에게 글을 쓰는 것도, 길을 나서는 것도 오랜만입니다. 발길은 설레고 마음은 무겁습니다. 바람은 봄바람이되 토라진 애인같이 냉랭합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꿈을 팔아 연명하는 마당에 꽃이 피어도 봄이 온 줄 모르니 ‘살아서 귀신이 되는 사람이 허다하다’던 벽초(碧初) 선생의 탄식에 다시 식은땀이 납니다.

대학을 졸업하던 무렵이 생각납니다. 국문학을 전공했다고는 하지만 겨우 학부를 마친 처지에 깊이 공부를 했다고 할 수도 없고, 문학 서클을 기웃거리며 글 쓰는 흉내를 내본 게 고작인 터에 혈기만 방자해져서 강호(江湖)가 넓고 두려운 줄 모르는 철부지였죠.

그런 지푸라기 같은 인연과 경력을 타박하지 않고 문학의 길로 이끌어준 선배들 덕분에 충북을 떠나지 않고 눌러 살면서 내 고장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당신도 인정한 사실이지만, 충북은 참 아름다운 땅입니다.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던 백두대간이 서쪽으로 휘돌아 뻗어가는 가운데 속리산 천왕봉을 기점으로 한남금북정맥이 갈라지는 까닭에 산이 깊고 수려한 데다 사철 맑은 물이 흐릅니다. 남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북쪽으로는 남한강이 흘러 그야말로 금수강산을 이루었고, 여기에 청풍명월을 더하면 한 폭의 그림이라는 헌사가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풍광은 그곳에 터를 이루고 사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심성을 심어 주었으니, 빼어난 시인과 걸출한 작가들을 낳고 길러낸 것이 필연이라 할 밖에요. 또 맑은 물과 맑은 바람은 투명하고 곧은 마음을 갖게 하였으니 그 선배들이 대개 민족의 불합리한 고난을 외면하지 않고 온몸으로 저항하는 정신을 보여준 것도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학교 강의실에서 접한 문학사가 손에 쥐여지지 않는 구름 같은 것이었다면, 문학단체에 불려나가 심부름을 하면서 만난 선배 작가들은 명실 공히 살아 숨 쉬는 문학사였습니다. 신채호·홍명희를 비롯해 정지용·오장환·권태응·조명희 같은 거장들이 나고 자란 마을의 골목길을 걷거나 생가 마당에 서 있노라면 그들이 큰형님이나 아버지같이 피를 나눈 혈육으로 다가왔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절창으로 읽었던 시 <유리창>과 한국인의 고향 노래가 된 <향수>, 해방과 격랑의 시대를 노래한 <병든 서울>, 수많은 밤을 두근두근 새우게 만들었던 대하소설 <임꺽정>, 농촌 아이들의 맑은 심성을 노래한 <감자꽃> 같은 작품을 다시 읽으며 비로소 사람 냄새를 맡게 됐음은 물론입니다.

작품으로나 문학정신으로나 근대 한국문학을 떠받친 대들보와 같았던 작가들을 선배로 두었다는 사실은 내게 큰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술잔을 놓고 마주앉은 자리에서 충북의 작가들을 빼놓고서는 한국 문학사를 쓰기가 난감할 거라고 우쭐거리며 흰소리를 하는 내게 당신은 ‘그래서 책임감도 느끼느냐’고 물었습니다. 당황한 나는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말문이 막혔습니다. 책임감이라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책임감 없는 자부심은 염치없는 것이다, 진정 선배들이 자랑스럽고 자부심을 느낀다면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는 당신의 말은 뒤통수를 치는 망치와도 같았습니다. 십년 심부름 끝에 대오각성, 뭐든 해야겠다는 숙제를 가슴에 품고 ‘피로사회’에서 견디는 중에 또 십년이 속절없이 흘러갔습니다. 공부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 이어지는 여행이어야 한다는 쇠귀[牛耳] 선생의 가르침은 참으로 뼈아픈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오래된 빚(?)을 조금이나마 덜어보겠다는 핑계를 앞세우고 길을 나섭니다. 문학으로써 우리 고장을 풍요롭게 한 선배 작가들이 나고 자란 집, 그들이 성장하여 떠난 후 더러는 돌아와 묻히기도 하고 더러는 타관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눈을 감는 날까지 못내 그리워했던 고향 산천을 돌아보는 길은 즐겁고도 아픈 행로가 될 것입니다.

나는 바랍니다. 도중에 만난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예사롭게 보아 넘기지 않기를. 낡아 쓰러져가는 것일지언정 길 끝에 헛간이라도 한 칸 남아 있어서 선배들의 자취를 느끼게 되기를. 집도 절도 사라지고 밭이 되었거나 아예 다른 건물이 들어서서 흔적도 찾을 수 없음을 실감하고 돌아설 때 설명하기 어려운 쓸쓸함이 뒤따르더라도 그것을 따뜻하게 받아 안게 되기를. 그곳의 풍광과 문화, 그곳 사람들의 눈빛과 손짓과 말씨 하나도 깊은 고마움과 경건함으로 몸에 새기기를 나는 바랍니다.

문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인 걸 통감합니다. 궁핍한 시대의 시인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 200여 년 전 괴테와 동시대를 살았던 시인 휠덜린의 물음 앞에 숙연해집니다. 선배 작가들의 흔적을 따라가는 일로써 누군가를 우상화 하거나 어떤 공간에 대한 성역화를 꿈꾸자는 건 아닙니다. 그들에게 꿈과 이상을 심어 주었던 이 땅에 대한 외경심을 회복하고, 민족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고 끝내 자신의 길을 걸어갔던 의지와 정신을 바로 되새기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밝은 데 없이 어둡기만 한 안목과 졸렬한 필설로써 그만한 소망을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섭니다.

이념의 그늘에 가려져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때부터 충북이 길러낸 시인·작가들을 양지에 내세우고 문학의 업적을 세심하게 가려 세상에 알리는 데 심혈을 기울여온 연구자들의 열정에 또 빚을 지게 될 것입니다. 사느니 느는 게 빚뿐인 백면서생(白面書生)의 길, 그래도 당신만은 응원해 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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