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장에서 우시장으로, 소 옮겨주던 채꾼 한성현
상주에서 청주, 수원까지…‘산 넘고 물 건너’ 이동

토박이 열전(1)
이재표 청주마실 대표

소몰이꾼이라는 직업이 있었단다. 소몰이꾼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2008년 11월이었다. 서울법전(서울대 법대의 전신)을 졸업한 빨치산 출신의 서양화가 김형식을 취재하다가 그의 방에 걸려있던 그림 <채꾼>을 보았다. 뿌윰하게 동이 트는 산길을 걷는 소떼와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림 속에 있었다. 감전의 충격을 느낄 만큼 신비로운 그림이었다.

“어린 시절이었지. 달이 떠오르는 밤, 괴산 우시장에서 음성까지 소를 몰아다 주고 돈을 받는 채꾼들의 행렬을 바라보고 형언할 수 없는 신비를 느꼈어. 밀레의 만종을 어찌 저 그림에 비할 수 있겠는가.”

▲ 마지막 소몰이꾼 한성현. / 사진=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실제로 채꾼을 만난 건 그로부터 6년이 지나서였다. 청주테크노폴리스부지로 수용되는 외북동 지역에 대한 구술채록을 진행하다가 동네에 소몰이꾼이 네댓 명 있었고, 그 중에 한 명은 아직도 살아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산중에서 범을 만나 병을 얻은 뒤로 소몰이를 그만뒀다고 했다. 호기심에 마지막 소몰이꾼을 찾아갔다. 한성현 씨는 160cm도 되지 않는 단신이었지만 단단한 체형이었다. 나이를 물으니 무진생(1928년)이라고 했다. 군대를 다녀온 것 말고는 평생 이 동네에서 살았다고 했다. 이 사람이 정말 소몰이꾼이 맞는 걸까?

“아, 그런 거는 왜 묻는 거야? 내가 젊어서 부모로부터는 씨앗도 하나 안 받고 허비적거리고 살면서 소 끌고 화령, 상주 안 다녀본 데가 없고 수원 정도는 문턱이었지. 휴전되고 나서 1년 못되어서 제대하고, 신(新)살림 내서 한 3년 넘게 했지. 한꺼번에 세 바리(마리)고 네 바리고 끌고 댕겼는데 나중에 소 싣고 다니는 차가 생겨서 그만 두게 된 거야.”

범을 만난 뒤로 소몰이를 그만뒀다는 얘기는 와전된 것이었다. 소몰이를 한 시점은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쯤으로 추정됐다. 화물차가 등장해서 한꺼번에 많은 소를 신속하게 옮길 수 있게 되자 소몰이꾼이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소도 수백 리를 걷는 고생을 덜게 됐지만 소몰이꾼이라는 직업은 사라지고 말았다. 어찌 됐든 궁핍하던 시절에 소몰이꾼은 땅도, 돈도 없는 무산자들이 현금을 손에 쥘 수 있는 일거리였음에 틀림이 없을 터였다.

“그러니까 그 짓을 하지. 밤새 잠도 못자고…. 보리쌀 몇 말씩은 벌었지. 그땐 배고파도 보리밥도 못 먹을 때였어. 두 바리 끌고 수원 가면 보리쌀 몇 말은 팔았던 거야.”

▲ 소몰이꾼과 송아지들(청주시내 1972년)

저 작은 체구가 여러 마리의 소를 끌고 수원까지 가는 길이 궁금했다. 소도 쉬고 사람도 쉬어야 몇 백리 길을 갈 수 있지 않았겠는가.

“수원 사람이 소를 사면 내가 수원까지 끌고 가는 거지. 청주에서 소전이 파하면 오후 3시에서 4시야. 그때 천안을 향해서 출발해. 밤중에 천안에 도착하면 마방(馬房)에서 소들은 자는데 나는 밤새 ‘소 짚세기(짚신)’ 삼고 소죽 끓이는 거야. 발이 네 개니까 신발 네 개를 삼아야 한 켤레지. 그때는 길이 비포장이라 자갈이 많아서 발바닥이 아프면 못 걷잖아. 천안 마방까지는 각자 오지만 천안부터는 넷이나 댓이나 함께 떠날 때가 많았지. 평택 가서 점심 떠먹고 그길로 수원으로 가는 거야. 밤 10시나 11시는 돼야 도착해. 내려올 때는 기차 타고 조치원역에서 갈아타고 청주역으로 왔어.”

소가 순한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장사라도 힘으로는 소 한 마리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 먼 길을, 그것도 여러 마리를 한꺼번에 몰고 가기 위해서는 분명 나름의 장치와 특별한 솜씨가 필요했을 것이다.

“보통 두 바리에서 네 바리 정도 끌었어. 황백이(황소)가 길에서 사람 치받고 그러면 난리나지. 황백이는 두 바리 밖에 못 끌어. 이놈들을 묶는 게 중요한데 되게 매면 못 걷고 능청하게 매면 또 늘어지니까 어지간하게, 돌아서도 못하게 묶는 거지. 대개 사내끼(새끼줄)로 묶는데 머리부터 해서 코도 묶고 방딩이(엉덩이)로 돌려서 배를 뜨는 거야. 그래도 번쩍번쩍해서 믿지를 못해. 종당에는 채질을 할 수밖에…. 막대기 끝에 끄내끼(끈)를 매서 척척 때리면서 갔지.”

▲ 일제강점기 수원우시장

소몰이꾼을 채꾼이라고도 한다. 채찍질을 채질이라고 하니 채꾼은 여러 마리의 소를 몰기 위해서 채찍질을 하는 사람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한 씨는 경북 화령장과 상주장도 자주 다녔다고 했다.

“상주에서는 사흘 아침나절에 청주에 댔지. 화령에 오면 저녁 지나고 보은 오면 깜깜한 밤중이야. 어디 밥 해달라고 할 데가 있나. 상주서 곶감 꼬치 사서 꾸역꾸역 먹으면서 오는 거지. 밤에도 산길로, 산길로 오는 거야. 멀리 푸르스름한 불이 보이면 소가 소나무 속으로 숨잖아. 산짐승이야. 내가 모닥불을 놓고 쪼이다 보면 그 불빛이 사라져. 그러면 소귀에다 대고 소리를 빽 질러서 일으켜 세우고 또 걷는 거야. 가덕쯤에 오면 먼동이 트는데 입성에는 땀이 가득 찼지. 가덕에 와서 아침 떠먹고 그길로 영운동 마방에 소 대주고 ‘이건 누구 소라고’라고 말해주면 일이 끝나는 거야. 도착하는 시간이 점심 전이었어. 한 11시쯤….”

소전마다 소값이 그렇게 차이가 났다면 소몰이꾼이 아니라 아예 소장사로 나서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소장사들은 저울로 안 달아봐도 알아. 눈대중으로 사지. 나도 상주, 화령에서 한 마리, 두 마리 사서 끌고 올 때도 있었어. 그런데 끌고 댕기면 뭘 해. 차라리 괴기(고기)업자 소를 끄는 게 낫지. 그 사람들이 얼마나 남기는지도 몰라. 팔릴 때까지 바라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소몰이 삯’만 받아가지고 왔던 거지 뭐.”

이제와 생각하니 빈 들녘에서 이삭을 줍던 사람들이나 남의 소를 대신 끌어주던 사람들이나 삶 앞에 치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인생길은 거칠고 노동은 숭고하다.

예로부터 청주의 ‘쇠전(우시장)’은 전국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지금의 청주 우시장은 송절동(1985년 이전)에 있다. 1977년에는 모충동에서 충북대 방향으로 가는 개신동 고개 위에 우시장이 있었고, 1963년에는 영운동에 우시장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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