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격외도리/ 한덕현 발행인

▲ 한덕현 발행인

김무성에 대한 윤상현의 막말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xx 다 죽여, 그런 xx부터 솎아내...”라는 육두문자에선 우선 권력의 살벌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제 아무리 취중 발언이라고 해도 일개 의원이 당대표를 이런 식으로 매도했다면 그 조직은 이것으로 끝이다. 권력에 취하지 않고선 있을 수 없는 이른바 불가능한 시츄에이션인 것이다. 양아치들의 세계에선 윤상현 식 발언은 곧 죽음이나 다름없다. 결국 그는 자신이 그토록 자신만만하던 정치무대에서 졸지에 퇴출당할 절체절명의 위기에 섰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현 정권이 들어선 이후 우리나라에는 온통 죽고, 죽이고, 죽여버리자는 살(煞)의 기운이 도처에 넘쳐난다. 말도 안 되는 사고로 한 순간에 300여명의 학생들을 수장시키고도 뭐가 부족했던지 그 뒤로도 들리는 것은 온통 누구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응징의 의기들 뿐이다. 마음에 안 든다며 유승민을 찍어내 사지로 내몰고 말을 안 듣는다며 국회와 국회의원을 심판하라고 부추기는가 하면, 겉으론 통일을 외치면서도 북한체제와 김정은의 씨를 말려야 한다며 분단 이래 최고, 최대의 무기들을 원없이 한반도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런 기운에 화답(?)이라도 하듯 총선 공천을 놓고서도 목하 또 다른 죽임의 푸닥거리가 이어지고 있다. 한쪽에선 상대에 대한 배려라고는 한치도 없는 메마른 인간(이한구)이, 다른 한쪽에선 여야를 넘나들며 양지만을 좇아온 정치적 회색 인간(김종인)이 거침없는 검무(劍舞)로 정치판을 농단하고 있다.

왜 이들이 여야의 대표가 되어야 하는지도 헷갈리지만, 더 혼돈스러운 것은 이러한 현상들에 어느덧 순치되어 저들이 하는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우리 국민들의 무기력증이다. 이는 포기나 체념일 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어느덧 익숙해지는 적응’일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국정은 물론이고 정치와 총선판까지도 오로지 상대를 향한 배척과 말살의 경음(硬音)만이 난무하고, 국민들의 감성에서조차 이젠 남을 죽이고 고사시키는 게 아예 일상이 된 듯한 느낌이다.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패륜 범죄가 빈발하고 하다못해 상대의 작은 실수에도 목숨을 건 보복운전을 감행함으로써 연일 언론을 장식한다.

사람들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하찮은 사석에서조차 죽일 놈이니 죽어야 할 놈이니 하는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지는 게 요즘의 세태다. 문재인도 죽일놈이고 김무성도 죽일놈이다. 권력의 최정점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차마 입에 담지못할 욕설이 쏟아지면서 어느 땐 좌중을 압도한다. 위로는 국가 통치행위에서부터 아래로는 농투성이들의 잡담에 이르기까지 온통 죽일놈 타령이니 이에 대한 사람들의 감각도 어쩔 수 없이 무디어지고 있다. 마치 “한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명의 죽음은 통계에 불과하다”는 스탈린의 통찰(?)처럼 말이다.

우리나라 헌정사에서 요즘같은 분위기가 횡행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독재와 민주가 대립하고 좌·우가 심각하게 부딪치는 시절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학생과 군부 등 특수 관계인들의 집단, 혹은 특정 정치세력들 사이의 반목과 괴리가 사회적 갈등이나 폭발을 일으킨 적은 있지만 지금처럼 대통령부터 저 밑바닥의 서민까지 나라 전체가 피아(彼我)로 딱 갈라져 서로 죽어야 한다며 강력한 실행력까지 수반한 경우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4.13 총선 또한 누구를 찍어내고 누구를 죽이느냐가 최고의 화두이자 의제가 됐다. 지금 국민들은 가중되는 실물경제난에 거리를 헤매며 전전긍긍하고 있는데도 무슨 정책이니 공약이니 하는 것들은 일찌감치 물건너갔다. 지금까지 스무번의 총선을 치러왔지만 이러다가는 이번 총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죽느냐 죽이느냐로 점철된 초유의 사례로 기록될 조짐이다.

유승민과 윤상현에 대한 처리를 놓고 정권과 정치권은 물론이고 온 나라가 블랙홀로 빠져들고 있는 작금의 현상에 대해 먼 훗날 역사는 이를 어떻게 기록할 지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다만,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운 교훈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비록 그것이 국정교과서가 되더라도 사실을 마냥 호도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말이다.

어차피 민주주의는 ‘나하고는 절대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공존과공생이다. 내 맘에 안들고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들을 자꾸 응징하고 내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러한 타협과 배려의 휴머니즘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 세기의 독재자 스탈린이 어쩔 수 없이 고백한 것도 바로 이것이다.

‘(독재자가) 가장 두려운 것은 인간이 인간다워질 때이다’
과연 왜일까? 우리는 지금 이를 학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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