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사회읽기/ Artist 2창수

어느 추운 날 자신의 몸에 차가운 물을 붓는 젊은 예비 작가를 보고 나이 지긋한 중견작가는 쯧쯧거리며 조소를 보냈다.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대학생들은 좋은 화제꺼리가 생긴 듯 이 사건을 뒷 담화에 즐겨 사용하곤 했다. 행동으로 작가의 뜻을 전달하는 장르인 행위예술(Performance art)은 일반인들이 보기에 기괴하기 이를 때 없다.

▲ John Cage toy piano.

일반인들에게 작가의 뜻을 이해할 사전 준비가 이루어 지지 않았고, 설명도 거의 없는 경우가 많아 이해하기 어려운 장르중 하나이다. 작가가 몸으로 진행하는 행위예술은 일반인뿐만이 아니라 전문작가라도 이해하기 어렵고 사전 지식이 충분하지 않는다면 비평가도 엉뚱한 평가를 하기 쉽다.

행위예술은 20세기에 새롭게 장르를 개척한 것처럼 이야기 되지만 과거 연극처럼 기존 가치관에 거부하려는 과장된 몸짓에서 근원을 찾기도 하며, 인류사와 역사를 같이 할 만큼 오래된 장르로 인식되기도 한다. 한국의 경우 판소리나 탈춤과 같은 공연도 행위예술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이야기하는 퍼포먼스와 어떠한 차이를 가질 수 있을까?

▲ Cage preparing a piano, in 1947.

연예계 데뷔를 시켜준다는 상품을 미끼로 TV를 통한 광고 효과와 유명 연예인들의 평가를 통해 참가자 자신의 상품을 극대화 한다는 오디션 프로그램은 대중적 관심을 이끌어 내며 승승장구하였다.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전혀 예술적이지 않는 대중매체 전문가가 하는 상품 매뉴얼을 따라 한 결과가 오늘의 동일패턴을 반복하고 있는 대중 음악시장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아직 지지하는 대중은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상황과, 오디션 참가자의 성공을 통한 착각의 환상에서 자신미래를 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움에 심취한 상업음악과 달리 오로지 침묵으로 연주한 공연이 있었다. 1952년 8월 29일 뉴욕에서 David Tudor의 연주로 총 3악장으로 구성된 무음 연주가 있었다. 연주 악장에는 연주 말고 쉬어라라는 Tacet라는 악상만 쓰여 있었으며 연주자는 피아노 건반뚜껑을 열고 다시 내리며 공연을 끝마쳤다. 놀란 군중은 이것이 뭔가 싶어 조용이 웅성거리는 소음을 내었고 이것이 존 케이지의 유명한 <4분33초>라는 곡이다.

존 케이지는 1951년 하버드 대학의 무향실에 가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장소에서 들리는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러한 소리에 의문을 갖게 된 케이지는 공학자에게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알아보게 되었고 그 소리는 신경계가 돌라가는 높은 소리와 혈액이 순환하는 낮은 소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무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케이지는 이것을 이용하여 작품을 만들게 되었으며 그것이 무음 곡이 된 것이다. 기존의 음악의 가치관에 대한 도전한 존 케이지는 다양한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영감을 주었으며 악기의 변형적 활용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대중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상업예술가들이 굳이 비 예술가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이 하는 상업을 고상하게 설명하려 그들 스스로 예술가인척 하면 안 된다. 당당하게 돈 벌려고 상업한다면 그들에 걸 맞는 일을 하면 그뿐이다. 조선왕조실록 열심히 본다고 역사학자 아니고, 얼굴에 화장 열심히 그린다고 화가 아니다. 몸매는 아무리 좋아도 예술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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