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琉璃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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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琉璃窓)
  • 충청리뷰
  • 승인 2016.02.25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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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시 읽기

유리창(琉璃窓)
정 지 용

유리(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琉璃)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山)새처럼 날아갔구나!
  - ‘ 조선지광(朝鮮之光)’ 89호 (1930)
 


허장무 글·이은정 그림

보름 전 교토에 갔다가 ‘도시샤’대학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인문학부 건물 앞 잘 정돈된 정원 안에는 이 학교를 다닌 한국의 두 시인, 정지용과 윤동주를 기리는 시비가 아담하게 세워져 있어 한참을 머물다 왔지요.

그동안 많은 사람의 발길이 닿은 듯, 시비 앞에는 작은 꽃다발과 여러 기념물들이 놓여 있어 보기 좋았고요. 요즈음 영화화 되어 장안에 화제가 되고 있는 윤동주의 시비에는 그의 대표작인 ‘서시’가 새겨져 있었고, 그보다 선배로 영문학과를 졸업한 정지용 시비에는 ‘압천(鴨川)’이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 유학 시절에 쓴 시가 새겨져 있었지요, 내친김에 교토시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압천엘 가보았습니다. 정 시인이 유학 시절 이 강둑을 거닐며 시심을 달랜 듯한 작품이 ‘압천’이더군요.

알려진 대로 현대시의 선지자 정지용 시인은 ‘향수’의 고장 옥천 출신으로, 한국동란 당시 뜻 모르게 유실된 아까운 분이지요.

이 시는 어린 자식의 죽음에 대한 아버지의 애절한 슬픔을 노래한 작품인데요. 슬픔의 주체가 바로 시적화자인데도 맑고 차가운 감각적 이미지에 의해 감정이 과잉 노출되지 않고 절제되어 표현됨으로, 오히려 읽는 이에게 슬픔의 정서를 더욱 확장시켜 전달하는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깊은 밤 고요한 시간, 잠 못 이루고 거실에 나와 유리창에 입김을 호 불어보고 또 지우고 다시 불어보고 하는 행위를 통해 슬픔의 극한을 자제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가슴을 애입니다. 이때 유리창은 이승과 저승의 운명적 단절과 교감의 매개체가 되지요. 창 밖 어둠 속으로 날아가 버린 어린 생명을 한 마리 가련한 새로 형상화하여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고 말하므로 죽은 아이의 영상을 그려보는 망연한 아비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때 보석처럼 박히는 ‘물 먹은 별’은 그리움에 사무친 화자의 방울방울 맺히는 뜨거운 눈물이고요. 또 ‘외로운 황홀한 심사’라는 모순형용을 구사함으로, 아이의 환영이나마 보고 싶어 유리에 ‘입김을 흐리우는’ 아버지의 동작의 반복을 통해 슬픈 욕망의 허무함을 더욱 진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고귀하고 아름다운 나약함과 더불어 강인한 슬픔을 지닌 것이 인간이지요. 이 시는 운명처럼 다가서는 상처에 대하여 그리고 고통스러운 상처의 치유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러 고통은 언젠가는 지칠 때가 올 것이나, 다만 생을 바쳐 그리워할 것이니, 가끔은 물 먹은 별이 눈가를 적실 것이니, 그리하여 가 닿을 수 없는 애절함은 끝내 한 편의 좋은 시로 환생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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