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년 첫 충북대회, 신청자 없어 다방·주점 종업원 9명 설득 참가시켜
탈의실 유리창 파손 사건도, 지역 유명미용실서 경쟁적으로 후보물색

김운기 사진작가·전 충청일보 사진부장

본 글은 청주문화원이 발간한 청주문화 30호에 실린 ‘청주이야기 열마당’ 가운데 김운기님의 기고문을 전재한 것이다. 전재를 허락해 주신 필자와 청주문화원측에 감사드린다.

본성적으로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참되고(眞), 착하고(善), 아름다움(美)’을 끊임없이 추구해 온 것이 인간의 역사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은 끝이 어딘가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이러한 인간적인 욕망의 일단을 구체화 시키고 극대화하여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벤트가 바로 미스 코리아 선발대회.

미스 코리아 선발대회는 지역 예선을 통해 중앙대회가 한국일보의 주관으로 이루어졌는데, 여기에서 미스 코리아 진·선·미가 결정되고 이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미인으로서 세계대회에 출전하는 영예를 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충북대회는 충청일보가 주최했다.

미스충북 60년 역사 속에는 애환과 뒷이야기도 많았다. 미스 코리아 초창기와 현재의 사회 환경은 너무도 많이 변화했다.60년대 초까지 미스충북 후보들의 수영복차림은 어깨를 덮고 바지는 무릎 아래 가릴 정도라서 사실 육체미를 본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미니스커트가 유행하면서 수영복도 그 형태이나 색채가 현란해지고 반라(半裸)의 여인의 육체미는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 여성들의 외양이 점차 그를 닮아가는 경향이 짙었다.

신문사 회의실서 비공개 첫 대회

1957년 한국일보사의 권유를 받아 행사를 시작하게 된 국민일보사(충청일보사의 전신)는 첫 대회부터 난관에 봉착 했다. 신문지상에 후보자를 찾는 공고를 연일 게재를 해도 등록하는 후보자가 한명도 없어 다방 레지와 유흥업소 종업원들을 겨우 설득하여 1958년 첫 대회를 준비 중 9명의 후보자중 유력한 후보가 중도에 사퇴하면서 후보자 8명으로 대회를 치러야 했다.

첫 번 행사는 1958년 5월30일 개최 했는데 일반인들의 관심이 많았다. 보수 성향의 충청도에서 수영복차림의 미녀를 한자리서 여러 명 볼 수 있다는 호기심, 여론을 의식한 국민일보사는 비공개로 회사 회의실에서 대회를 치렀다. 당시 신문에 보도된 내용은 “평상복과 용모심사에 이어 육체미를 심사하기 위하여 해수복으로 바꿔 입은 다음 한명씩 심사위원 앞을 지나며 자신의 몸매를 뽐내고 자리로 돌아가 자리를 잡으면 심사위원들이 채점을 했다”고 보도 했다.

첫 번 대회에서 미스충북 진은 김분이 양(金粉伊), 준 미스에 이상찬, 조영희 양이 각각 선발됐다. 진에 뽑힌 김분이 양은 경기도 부천출신으로 21세, 중학교를 졸업하고 청주로 이주, 수줍기는 했으나 부잣집 맏며느리 감으로 호평을 받았다. 김학응 도지사를 비롯하여 신문사 임원들과 기관장들이 충북을 빛내달라는 당부와 함께 간곡한 전송을 받은 김양 일행은 미스코리아대회가 열리는 한국일보사로 떠났다.

1958년 미스코리아 선발에서 예선 통과에 그친 김양은 청주로 돌아와 “보수적이며 봉건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충북에서 부족하지만 자신을 대표로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 중앙과 지방문화 수준이 달라 미인의 기준이 달랐음을 알았다”고 말했다.

미스충북대회 초창기는 여대생 미인을 찾거나 미인 여성 부모님을 찾아가 대회에 출전 해 줄 것을 권유하는 등 신문사에서 직접 후보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또 하나는 미장원에서 미인을 찾아 충북 일원을 훑으면서 가능성 있는 미인을 발굴, 미스충북대회에 참가시키고자 무던히도 애를 쓰기도 했다.

충북을 사랑하는 애향심도 있었겠지만, 자기 미장원의 권위를 높이고 유명세를 얻어 광고 효과도 내자는 심산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계산 때문이었는지 미용실 나름대로 미녀 찾기 경쟁을 벌여 주최측에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미인 선발은 처음 신문사 회의실에서, 또는 시청 회의실, 청주극장, 현대극장, 중앙극장을 돌아가면서 대회를 치렀다. 당대의 인기가수와 연예인들을 초청 해 관중들의 인기를 모았다.

청주·현대·중앙극장 돌며 대회

70년대 중반 중앙극장에서 18명의 후보가 참가한 가운데 대회를 열었는데 호기심에 가득 찬 청소년들이 후보자들의 몸매를 보려고 탈의실 유리창을 깨고 쳐들어와 직원들이 드레스로 몸을 가려주고 경찰이 현장을 정돈하면서 어렵게 대회를 마치기도 했다. 그 대회 진행 중 사진촬영을 담당했던 필자도 탈의실에 메모를 전해주려고 들어갔는데 후보자 3명이 윗도리를 벗은 채 다가와 “아저씨 나 어때요? 진으로 뽑아주세요!” 황당하여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답답했다. 열기가 고조된 후보자들은 자신이 가장 예쁘고 진으로 뽑히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옷을 벗은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 것이다.

관중이 많아지고 인기가 높아지면서 극장무대도 좁아 청주체육관이 개관되면서 많은 관중을 모을 수 있는 실내체육관이 전용 미인대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대회를 치루고 나면 낙선한 후보와 가족들의 항의도 거셌다. 선정과정에 비리가 있다는 둥, 예쁘지도 않은 후보를 힘 있는 사람이 뒤에서 밀어 선발되었다든가 하는 허무맹랑한 이유를 들어 불만을 표하기 일쑤였다. 본상이 아닌 향토미인상을 받은 일부 참가자들은 본상에 대한 미련과 집착 때문에 상패를 내던지기까지 하는 해프닝이 자주 발생했다.

본상 못받아 상패 팽개치기도

77년 대회부터 많은 후보자를 출전시키고 큰 상도 많이 받은 청주의 김하영미용실은 미스코리아 산실로 소문날 만큼 예쁜 후보자들을 미리 관리하여 미스충북 진은 물론 서울대회에서도 미스코리아 선 6명, 미 5명, 미스 태평양, 미스 한국일보 등 충북의 여성미를 전국에, 또는 세계에 알리는 금자탑을 쌓았다.

김하영 미용실의 김명자, 하성자 공동대표는 미스코리아 진을 뽑아보자는 목표를 세우고 매년 좋은 후보들을 양성시켰다는데 아직까지 진이 탄생되지 않아 안타깝다고 했다. 30년 가까이 미녀들 뒷바라지 하며 고생도 했고, 사연도 많았다고 한다. 대학교를 찾아 미녀들을 점찍어 놓기도 하고 심지어 다음해를 생각해서 여자고등학교까지 방문 미인학생들을 엿보기도 했단다.

얼굴이 작고 몸매가 좋아 찾아가면 부모님들이 극구 반대하거나, 남자친구가 있거나,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미스 코리아 준비에 필요한 경비를 댈 수 없거나 한 경우가 태반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어려운 집안의 규수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 무료로 잠재우고 경비까지 부담, 고락을 함께하며 몸매를 다듬고 훈련을 시켜 중앙무대까지 올라가 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키워냈다. 이때의 보람과 기쁨은 어떻게 형언할 수 없다면서 앞으로 미인 배출을 계속 해야 하는 지 고민이 크다는 피력도 한 바 있다.

후보자 중에 샘이 많거나 독특한 개성이 있는 미녀들은 낙선을 하면 위약금을 내라든지 왜 자신이 큰상을 못 받았는지 이유를 밝혀야 하고 로비를 하지 않아서 낙선됐다며 울며불며 항의를 받은 고충도 있었다고 한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근래 들어 미인 후보에도 끼지 못할 여인들이 찾아와 성형수술을 해서라도 미인대회에 나가고 싶다며 도와 달랄 만큼 미스코리아 대회가 지방 여성들에까지 인기가 높은 것은 좋은 직장에 취업하려는 목적이 아닐까 여겨진다고.

넘치는 미인대회 반대여론도

그동안 충청일보사가 문을 닫아 타 신문사에서 미스충북대회를 개최하거나 복숭아축제 고추아가씨 선발대회 등 이벤트행사에 참가 대회 이미지가 하락하기도 했지만 충청일보사가 다시 되찾아 대회를 운영, 2015년 대회를 청주 라마다플라자 호텔에서 성대하게 치러 2015년 ‘미스 충북·세종’ 진으로 연서영양이 뽑혔고 미스 선에 김정진양, 미에는 이윤정양이 서발 되어 7월10일 서울 본선대회에 진과 선,미 3명이 참가하여 미스충북 선에 올랐던 김정진양이 미스코리아 선에 뽑혀 또다시 충북의 아름다운 여성의 미를 널리 알리게 됐다고 한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한때 여성단체가 여성을 비하하고 성적모욕을 주는 행사라며 중단하라는 비난도 받았으나, 인간의 본성이 바뀌지 않는 한, 세계 미인대회가 없어지지 않는 한, 또 미인대회에 참여하여 영광스러운 왕관을 써보고 싶다는 젊은 여성들의 꿈이 사라지지 않는 한 ‘미스 충북’ ‘미스 코리아’ 선발대회는 계속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충북 최초의 사진기자에게 묻다

본보 박소영 기자는 충북학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충북학> 제17집 ‘문화초점’ 인터뷰를 위해 지난해말 김운기 작가를 만났다. 당시 인터뷰 내용 가운데 일부를 발췌해 소개한다.

▶ 30년 사진기자로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무엇인가?

처음 사진기자가 되던 해 10월에 서부공단 기공식이 있었다. 충북의 경제가 거기서 시작됐다. 72년 8월엔 단양 수해가 크게 나 옛 단양이 절반이상 잠겼다. 사진을 다 찍고 육군헬기로 돌아오는데 헬기가 떨어져 죽을 뻔했다. 조종사와 서울 MBC방송국 기자랑 타고 갔는데 두 사람은 비상탈출을 했고 나는 뒤늦게 벨트를 풀고 빠져나왔다. 살기 위해 자갈밭으로 뛰어가 허리를 비볐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빨리 청주까지 데려다 달라고 소리쳤다. 청주 가서 신문을 만들어야 단양 사람들이 산다고 소리쳤다. 젊은 사람들이 부축해서 리어카에 나를 실고 청풍강으로 갔다. 물이 덜 빠져서 로프를 만들어서 잡고 건너가니 트럭이 하나 서 있었다. 트럭을 타고 제천을 가니 밤 11시가 됐다. 그날 하루 종일 굶다시피 해 거기서 설렁탕 두 그릇을 먹고 집으로 왔다. 샤워만 하고 다시 신문사로 출근했다. 필름 3롤을 찍었는데 현상을 해보니 사진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신문에는 보도사진 10장 밖에 못 쓰니까 사진전을 하자고 사장에게 제안했다.

72년 8월 23일 120장 사진을 뽑고, 기자들에게 캡션을 쓰라고 하고 청주문화원에서 ‘단양수해’전시를 열었다. 그게 굉장한 히트였다. 충북에서의 첫 보도사진이었다. 사진전으로도 처음이었다. 사진 기자로서 처음 큰일을 겪은 거였다. 74년 영동유조열차 전복사고도 기억에 남는다. 전복사고로 17개차가 불에 타고 사람 40명이 죽었다. 대청댐, 충주댐 수몰사진도 기억에 남는다.

사진기자 하면서 애로사항은 회사 차가 없다는 것이었다. 회사에 차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당시 충청일보 자매회사에 집차가 한 대 있었는데 급해도 잘 태워주지 않았다. 경찰차 타고 가기도 하고, 불나면 소방차 타고 다녔다 소방차가 노후 돼 생각만큼 빨리 가지 못했다. 자전거 타고 가면 이미 사건이 끝나니까. 아마 차만 있었어도 더 많이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 한 때 사진으로 현장을 보여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제는 너무 많은 매체와 기자들이 있다. 지역의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 무엇인가?

나는 이 시대의 행운아다. 우리나라는 기록성이 없다. 아버지가 가진 건 아들이 불태워 버리니까 없다. 전쟁에 쫓겨서 그런지는 몰라도 너무 안타깝다. 일본의 60년대 신문사 상황이 지금 우리나라 모습이다. 신문이 너무 많다. 일본은 전망이 없으면 문을 닫는데 우리는 버티고 있다. 그게 잘못 된 거다. 배고팠던 시절이었지만 무언가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시골에 무너진 집도 다 찍었다. 200~300장 찍었을 꺼다. 초가집시대에서 새마을 사업으로 슬레이트 집이 생겼고, 이후 국적도 없는 집이 지어졌다가 조립식 집이 지어지고 있다. 주거문화의 변화를 아무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뭐가 달라지느냐면 고향이 사라졌다. 한 마을이 사라지는 거다. 소백산을 15년 만에 사진 찍는 사람 데리고 돌아보니 마을이 150개가 없어졌다. 지금은 부모님이 계시니까 마을이 있지만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지방문화재도 기록된 것은 거의 다 찍었다. 지진이나 재해가 나면 없어지니까. 기록을 남겨야 한다. 기자들이 자긍심을 갖고 꾸준히 충북을 기록해야 한다. 오늘부터 기록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개인적으로 내가 소띠이고, 소 사진을 좋아한다. 4년 후 소의 해에 전시를 한 번 해보고 싶다. 이제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사진기자로 살면서 너무 많은 걸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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