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 무 (僧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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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 무 (僧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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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2.03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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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시 읽기

승 무 (僧舞)
조 지 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 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合掌)인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문장’ 11호 (1939. 12)

<허장무 글·이은정 그림>

‘승무’는 조지훈 시인이 ‘고풍의상’, ‘봉황수’와 함께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고아하고 섬세하게 민족정서를 노래하던 초기의 대표 시에 속하지요. 1930년대 후반 가을, 수원 용주사(龍珠寺)에서 승무를 처음 보던 날, 그만 춤에 몰입되어 그 온전한 정서 속에 강열한 시정을 느끼던 차에, 다시 김은호 화백의 ‘승무도(僧舞圖)를 접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구상한지 열한 달, 집필을 시작한지 일곱 달 만에 완성하게 된 수작입니다.

처음 3연 까지는 춤추려는 찰나의 모습이 묘사되는데요. 하얀 박사 고깔에 가려진 파르라니 깎은 머리와 두 볼에 흐르는 빛에서 처연함 속에 빚어지는 아름다움을 ‘정작으로 고와’서 서럽다는 명구로 그려냅니다. 곱게 숙인 아미와 볼 선을 타고 흐르는 옆모습 속에 감춰있는, 머리를 깎을 수밖에 없었던 세속적 슬픔을 읽어낸 것이지요. 다음 연은 텅 빈 무대 위로 황촉불이 흐르고 소슬하게 오동잎이 집니다.

드디어 5연부터 도도한 춤사위가 전개되는데요. 허공을 긋는 긴 소매와 치마 끝에 사뿐히 들어 올리는 외씨보선 등, 곡선의 빠른 템포로 이어지던 춤은 서서히 느려져서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시선이 멈춥니다. 이렇게 때론 격렬하게 때론 고요한 정지태로 이어지는 춤 동작은 바로 번뇌를 떨쳐버리고 세속적 고뇌에서 벗어나려는 여승의 자기 정화의 몸부림으로 해석되는 것이지요.

어찌어찌 맞닿게 된 삶이 견딜 수 없도록 고통스러울 때, 그 불일치와 모순의 운명 앞에 우리는 때로 종교적 귀의에서 삶의 상처를 다스리고 극복을 꿈꾸기도 합니다. 그토록 괴로운 번뇌의 파도가 이윽고 복사꽃 고운 뺨에 두 방울 눈물로 승화되는 순간 지향하는 초월적 종교의 세계가 별처럼 반짝이는 것입니다.

발은 번뇌의 지상을 디디고 있지만 염원은 천상의 별빛에 닿아있지요. 그리하여 속세의 번뇌가 별빛으로 초월, 승화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안은 채 유장한 춤사위는 계속되고 삼경이 지나 밤은 점점 깊어가면서 긴 여운을 남깁니다.

고풍어린 어휘, 우아하고 유려한 춤동작, 그리고 전아한 전통 리듬과 소재들이 한데 어울려 연출된 승무의 무대 공간은, 우리 모두에게 한국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공간인 동시에, 한국어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준 발군의 무대였습니다. 참으로 한국 시사에 길이 남을 명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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