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청산중학교 담임교사-제자 간의 ‘20년 전의 약속’ 이뤄지다

본 글은 충북작가회의가 발간한 ‘충북작가’ 40호에 실린 조만희님의 산문을 전재한 것이다. 전재를 허락해주신 필자와 충북작가회의에 감사드린다.

조만희 수필가 이원중학교 교사
 

“선생님! 저 민호예요. 청산중학교에서 배운 황민호 말이예요.”
“오 그래! 민호 반갑구나. 그동안 잘 지냈니?”
“예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혹시 20년 전의 약속을 기억하고 계신지요? 바로 한 달 후면 그 약속 날이 다가와요.”

다소 긴장된 목소리와 함께 반가운 소식을 전해 준 휴대폰 너머의 주인공은 20년 전 청산중학교에서 가르친 제자였다. 내 어찌 20년 전의 그 약속을 잊으랴!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 나는 반 아이들과 함께 굳은 약속을 했었다. 그것은 ‘20년이 지난 후에 한번 만나보자.’는 다소 황당하달 수 있는 그런 약속을 했던 것이다. 아이들이 그때 한 약속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니….

1995년 새 학년이 시작 되면서 나는 근무지를 이 고장 최고의 오지 중 하나인 청산중학교로 옮겨야만 했다. 부임하면서 처음 찾게 된 청산중학교는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먼 곳에 있었다. 승용차로 자그마치 한 시간 반 이상을 달려야만 했는데 대도시에서 맞벌이를 하는 아내를 둔 입장에서 이곳 근무는 최악의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이곳은 ‘울며 왔다 울며 간다.’는 말이 무색치 않은 그야말로 꿈의 학교였기 때문이다. 부임하기 전 인사차 들렀을 때 선임자들은 하나같이 이곳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너무도 멀어 울면서 들어왔다가 천국 같은 이곳 분위기에 그만 정이 들어 울며 떠난다.’ 는 게 그들의 이야기였다.

인생 최고의 환영받은 첫 출근

첫 출근부터 그 말은 실감나게 다가왔다. 승용차가 학교 초입에 이르자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와 소리 높여 인사하는데 천사들의 합창이 따로 없었다. 어떤 녀석은 아예 승용차 꽁무니를 쫓아오며 환호성을 질러대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이런 환영은 그 어디에서도 없었다.

당시 청산중학교는 오지임에도 불구하고 학생 수가 제법 많은 편이었다. 전교생은 400여명을 넘어섰고 내가 담임을 맡은 2학년만 해도 세 학급에 학급당 인원이 47명이나 되었다. 전교생이 50여명에 불과한 지금에 견주어 보면 실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읍내에 있는 비교적 큰 학교에서 줄 곳 근무하다가 이곳에 왔던 터라 이곳의 분위기는 그저 모든 것이 작고 아담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이곳 아이들의 생활은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아직 인터넷이 없던 시대이고 보니 도시적인 문화를 집에서 향유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시골다운 놀이 문화가 딱히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아이들과 더불어 할 게 뭐 없나 생각하다가 자연탐사반을 조직하게 되었다.

청산은 이름처럼 자연 풍광이 너무도 빼어난 곳이다. 나는 이 점을 아이들에게 깊이 각인시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청산중학교 유일한 방과 후 동아리로 자연탐사반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틈만 나면 아이들과 더불어 산과 들로 나섰다. 들꽃을 채집하기도 하고 보청천 물길을 헤집으며 물고기와 더불어 놀기도 하였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어찌 보면 내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이곳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진무구한 이 아이들과 더불어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지내다 어느 날 문득 이 아이들의 미래가 궁금해졌다. 그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 기획 된 것이 ‘20년 후의 만남’이었다.

학급문집·일기 통해 기억 일깨워

처음 이 말을 꺼냈을 때 아이들은 매우 반기면서 선뜻 응해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채 20년도 살지 않은 이 아이들에게 20년 후의 약속은 가늠하기조차 힘든 아득히 먼 나라의 이야기로 여겨졌을 것이다.

나는 이 약속이 결코 허투루 해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좀 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내 놓았다. 이중 어느 한 명이라도 이 약속을 기억해 낸다면 이 약속은 반드시 성공할 수 있으리라 믿고 철저히 세뇌 작전을 구사하기로 한 것이다.

우선 먼저 학급 게시판에 〈2015년 8월 15일 우리 만나자〉라는 구호를 커다랗게 써 붙여 놓았다. 이 구호가 아이들 가슴 속에 스멀스멀 젖어들면 우리의 약속은 훨씬 더 실현 가능한 꿈으로 다가서리라. 또한 돌려가면서 학급 일기를 쓰도록 했는데 그날그날 일어난 일 중 가장 중요한 순간을 기록하도록 했다. 일기장 표지에도 〈2015년 8월 15일 우리 만나자〉는 구호가 새겨졌다. 모든 교과서와 노트의 표지에도 〈2015년 8월 15일 우리 만나자〉는 구호는 선명히 자리 잡았다.

이 구호는 체벌로도 활용되었다. 잘못을 지적당하면 아이들은 벌칙으로 〈2015년 8월 15일 우리 만나자〉라는 글씨를 A4용지에 빽빽이 써내야만 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심혈을 기울인 것은 학급문집 만들기였다. 이곳에 담겨질 내용이야말로 먼 훗날 우리가 만났을 때 최고의 화제 거리가 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문집 만드는 일에는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동참해야만 했다.

학년이 끝나갈 즈음 문집은 제법 훌륭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문집에는 아이들의 글쓰기 작품 외에 미술시간에 그린 자화상, 학급일기 등도 담겨졌다. 당시 최고 인기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들이 ‘우리가 뽑은 스타’란을 통해 문집의 한 면을 차지하였고, 연말 언론을 통해 발표된 10대 뉴스는 문집의 말미에 자리 잡았다.

20년전 찍은 비디오카메라 환호

민호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약속 날에 앞서 나를 미리 만나보고 싶어 했다. 그렇게 해서 다섯 아이들과 먼저 만나게 되었는데 막상 이 아이들을 만나고보니 아이들 알아보는 일이 만만치 않음을 깨달아야 했다.

열다섯 개구쟁이였던 아이들이 30대 중반의 성년이 되어 나타나니 20년 세월의 간극은 너무도 크기만 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릴 적 모습이 차츰차츰 살아나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섯 아이들은 ‘20년 후의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해 앞장서겠노라고 다짐했다. 나는 이 자리에서 20년 전에 캠코더로 찍어둔 영상 자료가 있음을 알렸다.

그 시절 나는 8mm 소형 비디오카메라를 장만해서 당시 아이들 활동 장면을 하나둘 기록해 두었었다. 그 때 찍은 영상물이 꽤 있었지만 그 이후 한 번도 재생해 보지 않았기에 그 내용이 궁금했다. 시대가 바뀌고 보니 테이프로 된 영상물을 재생해 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것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해서 꺼내봤던 것인데, 아이들은 20년 전 자신들의 모습을 찍은 영상물이 있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선생님 그거 두환이에게 보내면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 애는 자타가 인정하는 컴퓨터 박사잖아요!”

그로부터 며칠 후 컴퓨터 박사 두환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생님 저 두환이인데요. 옛날에 찍은 테이프 보내주시면 제가 디지털로 변환 시켜서 이번 만남의 날에 함께 볼 수 있도록 할게요.”

드디어 그토록 고대해 마지않던 만남의 순간이 다가왔다. 이번에 만나기로 한 날은 공교롭게도 해방 70주년이 되는 광복절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약속은 더욱 커다란 의미를 갖게 되었다. 아이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간밤은 소풍 전야의 아이처럼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전의 문집을 꺼내서 일일이 살펴보았는데, 그 안에는 20년 전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전투를 치르듯이 해서 만든 문집이 이제야 그 빛을 톡톡히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집이 제대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아이들과 수많은 전투를 치러야만 한다. 나는 담임을 하면서 문집을 꼭 만들어왔는데 그것은 교직을 시작하면서 스스로에게 맹세한 약속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담임을 맡아도 더 이상 문집을 만들지 못한다. 아니 만들 수 없게 되었다. 스마트 폰 시대가 되면서 아이들의 일상적인 글쓰기 문화는 사라지고 말아 아이들에게 글 한편을 받아 낸다는 것은 끔직한 일이 되고 말았다. 더군다나 국어가 아닌 사회교과를 가르치면서 그 일을 해낸다는 것은 큰 모험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문집 만들기는 10회를 끝으로 포기해야만 했는데, 초심을 지키지 못한 이 부분은 지금 생각해도 못내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광복 70주년, 20년만의 만남 성사

약속 장소에 가기 위해 주섬주섬 준비하고 있는데 KBS 취재진이 들이 닥쳤다. 친구에게 자랑삼아 이야기 한 것이 KBS로 제보되어 취재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제 이 역사적인 순간은 TV로까지 방영 하게 되니 그야말로 ‘우리들의 약속 20년 후의 만남’은 우리들만의 이벤트를 넘어서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시골에 거처를 마련한 것도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10여 년 전에 시골 빈집을 구입해서 내 손으로 일일이 손을 보아 <높은댕이집>이라는 당호를 내걸고 전원생활을 즐겨왔는데, 이 집 역시 이번 만남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촬영 팀이 다녀 간 후 나는 약속 시간에 맞추어 길을 나섰다. 오늘은 특별히 전통 한복을 입기로 했다. 생전에 할아버지께서 즐겨 입으시던 모시적삼을 입고 나선 것인데, 30여 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체취가 담뿍 담긴 한복 정장은 내 마음을 한결 차분하게 갈아 앉혀주었다. 제자들에게 줄 선물도 챙겼다.

제자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은 학급문집과 명찰이었다. 혹여 학급문집을 분실한 아이가 있지 않을까 해서 추가로 복사본을 만든 것이다. 길을 나서면서 아내에게는 텃밭의 옥수수를 미리 쪄 놓을 것을 당부했다. 직접 재배한 옥수수를 맛보게 하는 것도 나만의 특별한 선물이 되리라.

47명 중 20명 출석, 1명은 세상떠나

드디어 약속 장소인 청산중학교에 도착했다. 막상 도착하고 보니 학교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이들이 막 달려 나오며 환호하는 장면을 연상하다 그만 뻘줌 해지고 말았다. 1층 교실 복도를 지나는데도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2층 계단을 오르려는 데 그제 서야 kbs리포터가 달려 나온다. 먼저 교실로 들어가지 말고 아이들이 “선생님!” 하고 부르면 그때 문을 열고 들어가라고 했다. 곧 아이들이 부르는 소리가 힘차게 들려왔다.

그렇게 해서 나는 아이들을 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아이들은 약속을 멋지게 지켜냈다. 그것도 장장 20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 사실 아이들은 눈앞에 없었다. 옛날 개구쟁이 아이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너무도 멋지게 변신한 성년 아이들만이 당당히 그 자리에 서있을 뿐이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으랴! 큰 절로 인사를 나눈 후 가지고 온 출석부에 적힌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다. 한 명씩 호명한 후에는 일일이 명찰을 달아주고 감격적인 포웅을 나누었다.

그런데 출석을 부르다 보니 한 명의 아이가 이미 고인이 되어 있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나보다도 먼저 간 놈이 있다니… 순간 가슴이 턱 막히며 더 이상 출석을 부를 수 없게 되었다. 한동안 마음을 진정 시킨 후에 출석 체크를 마치고 보니 47명의 학생 중에 20명의 아이들이 참석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처럼 많은 아이가 참석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그야말로 대성황을 이룬 것이다. 지금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는 교실 한 켠에는 17명의 학생들이 이곳에 재학하고 있음을 표시하고 있는데 그 보다도 많은 아이들이 여기에 참석한 것이다. 참으로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년의 세월이란 한없이 멀기도 하고, 한편 가깝기도 한 세월임을 새삼 실감한 순간이기도 했다. 아이들을 저토록 변신시키는 세월에 놀라다가도, 그 세월이 이렇듯 선뜻 다가옴에 또 한번 놀라게 되니 어느 것이 진정한 세월의 얼굴인지 그저 알쏭달쏭할 따름이다.

학교 행사를 마친 후 아이들과 함께 나의 거처인 <높은댕이집>을 찾았다. 이곳에는 또 하나의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오늘의 주인공들이 나오는 20년 전 모습을 영상으로 만나는 순간이다. 큰 방에 스크린을 설치하고 두환이가 편집해 온 동영상을 틀었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20년 전 아이들 모습이 온전히 담겨져 있었다. 이것을 보는 순간 아이들을 일제히 환호성을 터트렸다. 마치 백 투 더 퓨처에 나오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 그들은 한동안 20년 전 세계 속으로 빠져 들어가 나올 줄을 몰랐다.

우리의 ‘20년 전 약속’은 그렇게 지켜졌다. 그 감동의 순간을 그 무엇으로 표현하랴! 이것을 필설로 표현한다는 것은 내 수준에 그저 족탈불급일 수밖에. 아이들은 20년 전의 약속을 하나같이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가슴 속에 자리 잡고는 있었지만 설마 이것이 현실로 다가 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장 민호가 모임을 주선할 때 드디어 올 것이 왔다며 다들 반겼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여학생은 최근에 연락이 되어 둘만이라도 학교를 찾아보자고 했다지 않은가? 20년이 되도록 사전 모임 한 번 이루어지지 않고 만나니 그 의미는 더욱 컸다.

그러나 아쉬움도 있었다. 20명의 참석자 중 8명이 결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10년이 아닌 20년 약속을 했을 때는 적어도 이때쯤이면 아이들이 제법 자수성가해서 나름대로 가정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고 있으리라 여겼는데 서른다섯의 나이에도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니… 어찌 보면 이것은 시대의 아픔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겨져 씁쓸했다. 시대가 좀 더 건강했더라면 더 많은 아이들이 이번 모임을 찾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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