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사회 읽기

Artist 2창수

▲ 나혜석

“나는 그대들(남성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 1934년 ‘삼천리’지에 기고한 ‘이혼 고백서’ 중에서

수원에 가면 시청 근처에 나혜석 이름의 거리가 있다.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거리 이름으로 나혜석이라 붙어있지만 1970년대 이전에는 바람피우다 이혼 당한 여인정도로 인식되어 거부감이 있는 이름이었다. 시대와 맞지 않는 당당한 여성으로 살다 쓸쓸히 죽어간 나혜석은, 당시 파격적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신여성이다.

나혜석은 호조참판을 지낸 증조부와 조부가 있었고, 아버지도 시흥군수를 지냈을 만큼 유복한 가정의 집안이었다. 당시사회는 남성과 여성 차이를 사회적으로 공공연히 인정 할 때라서 집안 사정에 따라 여러 첩들과 함께한 생활하기도 하였다. 나혜석은 다른 첩들이 낳은 자녀들과 함께 살면서 왜 남자는 여러 여자를 거느리는 것이 당연한데, 여자는 한 남자만을 위해 정조를 지키는 삶을 사는 것일까?란 의문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그녀가 성인이 되어 펼쳤던 여성 운동의 철학적 근간이 되었다.

▲ <신여자지> 1920년 4월호에 실린 나혜석 판화, 김일엽(女) 선생의 가정생활

나혜석은 1913년 일본으로 미술공부를 위해 유학을 가게 된다. 「세이토」라는 일본최초의 페미니스트 잡지를 알게 되고, 여성해방을 이해하게 된다. 이것은 남여 평등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된 것이었다. 나혜석은 우월한 미모와 지적인 행동으로 많은 남성들의 구애를 받았으니 나혜석의 남녀평등 주장은 더욱 설득력 있게 당시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수용될만한 이야기였다. 1914년 일본은 근대 여성주의와 민주주의 개념이 전파되었는데 자연히 유학시절 이러한 신문물을 접하게 되었고 유학생 잡지 등에 기고로 신여성운동에 동참하게 된다.

▲ 자화상

나혜석은 분명 유명한 한국 여류 미술작가이다. 그녀는 한국최초의 여성서양화가이며, 유복한 집안과 능력 좋은 남편의 역할로 미술대회에서 많은 상을 받게 된 것이 그녀를 유명하게 했을까? 그녀는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선진 미술수업이나 유럽 여행을 통해 이국적 모습을 보여 준 것만으로 유명한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녀가 유명한 한국의 여류작가인 것은 당시 시대와 맞지 않는 남여 평등을 줄기차게 주장하며 작품을 한 것이 그녀를 한국 대표 여류작가로 만든 것이다.

사회적으로 남여의 동등함을 외치던 나혜석은 이혼과 사회 멸시로 인해 정신쇠약, 치매로 1948년 무연고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녀는 53살임에도 검시관들의 눈에는 60대 중반으로 기록되었다. 이렇듯 초라한 행색으로 세상과 등졌지만, 역사는 그녀의 당당했던 20~40대를 기억한다. “내 갈 길은 내가 찾아 얻어야 한다.”는 여성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주었던 선각자였다. 비록 그녀가 찾은 내 갈 길이 사회와 가족과의 소통에는 어려웠지만 20여년이 지난 뒤부터는 사회가 그녀를 이해하게 되었다. 나혜석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 행동으로 저항했다. 거대한 바위와 같은 사회는 결코 깨지지 않을 것 같았지만 무수한 물방울들이 뚫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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