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준 만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데에 있다.
한 해를 보내며 서로 시혜자라고 주장하지말고 수혜자였다고 생각할 때 모든 인간관계는 좀더 부드러워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서로간의 관계에서 누군가에게 베풀었을 때, 동시에 그 사람은 이미 많은 것을 받은 시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베푸는 데에서 오는 행복감, 그것만큼 큰 수혜는 없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에 있어서 자식을 키우며 사랑을 줄 때, 사실은 그 사랑보다 더 많은 행복을 부모들은 자식으로부터 받고 있다. 그것은 자식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만으로 그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식으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행복이라는 형태로 받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식에게의 시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식으로부터의 수혜도 존재하는 것이다. 자식의 입장에서도 부모님께 사랑을 드릴 때 오는 행복감은 더 큰 수혜일 것이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커다란 시혜와 수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모든 관계에서의 작은 행동들이 이루어질 때 그것들은 그대로 동시에 시혜와 수혜가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어느 인간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도 역시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간에 사랑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서로가 충분히 주고받은 것이다. 그것을 두고 “내가 너를 키울 때...” 운운하거나, “부모님이 나한테 해 준 것이 ...”라며 불평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현 시국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과거에 민주화를 위해 얼마나...’ 운운하는 것은 이미 국민과의 관계에서 이상 징후를 보이는 것이다. 민주화투쟁을 할 때 그 분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던 것이다. 그 때 주고받은 것으로 계산은 끝내야 하는 것이다.
민주화의 어려움을 겪고 국민들을 위해 투쟁할 때 많은 것을 희생하였다고, 이제 무언가 눈에 보이는 보답으로 되돌려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어딘지 개운치가 않다. 더욱이 정치적으로 내놓고 그러는 태도에서는 어린 아이들의 투정을 보는 듯하다. 정치가와 국민과의 관계 역시 여느 인간관계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한편도 시혜만 있거나, 또는 수혜만 있는 관계가 있을 수가 없다. 시혜와 수혜는 동시에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관계의 끝을 나타내는 징후는 바로 서로 시혜자라고 우기는 것’이라는 어느 소설가의 말은 너무도 절묘하기에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다.
우리가 서로의 관계를 이렇게만 유지한다면 조금 더 산뜻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올 연말에는 서로 사람과의 관계를 산뜻하게, 준 만큼 이미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조금 더 밝고 따뜻하고 그리고 더욱 베풀 수 있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올 한해 누구에게건 내가 베푼 만큼 이미 받은 것으로 마무리하고, 새해 또 다시 베풀 준비를 새롭게 하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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