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어보는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김상수 충북재활원장·신부

 

▲ 김상수 충북재활원장·신부

2000년 전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오직 사랑하는 행위만으로 당신의 제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2000년이 지난 오늘 인류는, 그리고 나는, 표피적 사랑만 알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진정한 의미는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막연히 나를 죽이고, 나를 참음으로써 이타 행을 사는, 의무로써의 삶을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막연히 이해되던 ‘사랑’을 철학적, 사회학적, 심리학적으로 분석하여 규명해 놓았습니다. 괴리된 철학 서적이나 이론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실험하고 실천했기에 ‘사랑’에 대한 교과서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이성적으로 인식하는 유일한 생명체이지만, 그 자기 인식이 분리와 분산의 경험에 기초하기 때문에 불안감과 수치, 죄책감이 수반된다고 했습니다. 결합되지 못하고 분리되어 있다는 상실감으로 인해, 인간은 일치를 향한 강렬한 욕구를 드러냅니다. 마약이나 술, 성적 쾌락 등의 탐닉과 집단과의 융합을 이루려는 시도들은 분리불안을 피하기 위한 행위입니다. 온전한 융합이 아닌 일종의 중독된 이 행위들은 시간이 지나면 더 큰 분리를 느끼게 되어, 탐닉과 중독은 반복됩니다.

분리불안에서 비롯된 차이를 없애려는 경향이 현대로 오면 평등개념이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성을 잃어버린 ‘동일성’의 형태로 드러납니다. 규격화된 일상 안에서 노동과 오락, 창조적 작업까지, 오직 결과로 드러나는 것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결합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합일은 인간실존의 관점에서 보면 올바른 해답이 아닙니다. 에리히 프롬이 그의 책 「소유냐 존재냐」에서 규정한 소유양식의 삶에 매몰된 형태입니다.

▲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지음. 설상태 옮김. 청목사 펴냄.

‘사랑’은 타인과 분리된 벽을 허물어 결합시키는 힘입니다.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기 때문에‘빠져든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며 ‘참여한다’ ‘주는 것이다’가 올바른 표현입니다. 여기서 ‘주는 것’이란 포기하고, 빼앗기고, 희생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가진 것을 자기로 착각하는 소유양식의 삶은 주는 것, 즉 사랑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두려워합니다. 자아도취와 의존, 착취, 축적하고자하는 욕구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사랑’을 살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있는 그대로 일체감을 느끼는 상태

사랑은 책임과 보호, 존경, 지식이라는 요소로 이루어집니다.‘지식’이란 자신 안에 갇혀 세상을 보고, 타인을 평가하는 제한된 지식이 아니라 나와 너의 중심을 꿰뚫는 지식입니다. 이러한 지식을 통해 온전히 독립적인 인격이 되었을 때 타인을 지배하거나 착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존경’입니다. 자신에게 봉사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방식대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 상대의 독특한 개성을 인식하고 착취가 없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지식’이 바탕 된 ‘존경’이 이루어질 때 맹목적이지 않고, 온전한 의미의 ‘책임’과 ‘보호’가 가능합니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나의 필요와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그 자체로 일체감을 느끼는 상태입니다. 이로써 분리를 극복하는 온전한 합일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사랑’입니다.

프롬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외부의 강요가 아닌 자발성에서 이루어지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도피주의적 행동에 몰입하지 않아야 하며, 금욕주의가 아닌 자기 통제와 정신집중을 위한 명상과 독서, 음악 감상 등이 도움이 됩니다. 온전히 정신을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은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귀중한 조건이기도 합니다. 혼자 있다는 의미가 스마트폰이나, 기타 등등에 몰입된 오늘날의 도피주의와 같은 형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에리히 프롬이 말한‘사랑의 기술’은 온전한 존재론적 변화를 통해서만 행할 수 있습니다. 소유양식의 삶으로는 사랑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배우고 익히기 위해서는 스스로 온전한 존재에 기반을 둔 삶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우리가‘사랑’ 한다고 할 때 얼마나 미성숙하며, 이기적 형태의 계산과 착취와 두려움이 기저에 깔려 있는지 보게 된다면, 프롬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이 발표될 당시보다 더 심각한 수준의 소유양식과 도피주의 형태의 문화가 개인의 실존을 위태롭게 합니다.

당장 온전한 사랑을 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 매순간 자기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하루에 조금씩이라도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어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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