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택지개발지구서 ‘흥덕사’명 금구(禁口) 발견 전국 떠들썩

절터 발견 공사 막기까지 1개월 허송, 흥덕사지 1/3 이미 잘려나가
프랑스서 직지 원본 본 전두환 전 대통령 지원으로 박물관 건립 순항

박상일
역사학박사, 청주문화원 수석부회장

▲ 1985년 청주대박물관이 발굴조사한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흥덕사지는 현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을 인쇄한 곳으로 사적 315호로 지정됐다. 사진은 1985년 발굴 당시 흥덕사지 전경. / 청주대학교 박물관 제공

청주를 대표하는 문화 콘텐츠인 「직지」를 인쇄한 곳으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청주 흥덕사지를 발굴한 지도 어느덧 30년이 되었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더니 흥덕사지에서도 이를 실감하면서 내 나이도 돌이켜 보게 된다. 흥덕사지 발굴이 먼 과거의 일처럼 서서히 잊혀져가고 있던 차에 금년에는 새해 벽두부터 증도가자가 논란이 되면서 그 때를 다시 추억하게 하였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13일에는 발굴조사 30주년을 기념하여 직지국제컨퍼런스가 성대하게 열렸다. 흥덕사지 발굴조사를 직접 담당하였던 당사자로서 당시의 발굴을 하게 된 과정과 조사보고서나 각종 논문에는 쓰지 못하였던 뒷이야기들을 다시금 추억해 볼까 한다. 청주시내 곳곳에 나붙어 있는 「직지」 홍보물과 흥덕사지 그리고 청주고인쇄박물관이 어떤 연유로 자리매김 하였는지 돌이켜 보는 것이기도 하다.

촌로 덕분에 고려 절터 확인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높고 푸른 하늘이 천하절경을 이루던 가을이었다. 1985년 10월에 청주는 흥덕사지가 확인되면서 청주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의 학계와 문화계가 떠들썩하였다. 흥덕사지 확인이 발표된 10월 10일에는 신문과 TV 등 모든 언론 매체에 톱뉴스로 나갔고 전 세계에도 타전되었다.

그 후 한동안 지역신문에는 거의 매일같이 흥덕사지 관련보도가 나갔고, 방송매체에서도 수시로 특집프로그램을 내보냈다. 흥덕사지가 유명해진 것은 당연히 「직지」를 인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유네스코가 1972년을 ‘책의 해’로 정하고 이를 기념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한 도서전시회에 「직지」가 출품되면서 현존 세계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국내외에 크게 알려졌다. 그러나 정작 이를 인쇄한 흥덕사 터는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운천동 연당골 절터를 발굴하던 중 ‘흥덕사(興德寺)’가 새겨진 금구가 발견됨으로써 절터의 이름과 함께 「직지」의 발행처를 확인한 것이다.

필자와 흥덕사지 그리고 「직지」는 전생부터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흥덕사지가 세상에 알려진 과정을 이야기하자면 필자와의 인연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1984년에 운천동 택지개발사업이 시행되면서 무심천변의 운천동사지(현 청주시 운천동 CCC아카데미센터 북측 어린이놀이터)를 필자가 근무하는 청주대박물관이 발굴하게 되었다. 발굴을 시작한 며칠 후 ‘김정구’라고 자신을 소개한 76세의 한 노인이 현장천막으로 자전거를 타고 찾아와 담배쌈지에서 신문지로 꼬깃꼬깃 싸맨 동전 두 개를 꺼내놓으며 가치가 있는 거냐고 물으셨다. 조선시대에 흔히 사용된 상평통보(常平通寶)와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하기 위해 만든 당백전(當百錢)이라고 자세히 설명해 드렸고 그 노인은 자전거를 돌려 그냥 돌아가셨다.

그런데 한참 후에 다시 오셔서는 자신의 집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돌이 있는데 뭔지 모르겠다며 한번 봐줄 수 없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연꽃무늬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여 노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사직동 변전소 옆의 그분 댁으로 달려갔다. 툇마루 앞의 댓돌을 살펴보니 안상(眼象)이 새겨진 석탑부재였다. 돌의 출처를 물으니 예전 살던 집에서 이사를 오면서 버리기 아까워 가져왔다고 하신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노인의 안내를 받아 옛집을 찾아가니 그곳이 연당골 지금의 흥덕초등학교 부근이다. 마을 주변에는 많은 기와편이 널려 있었고 뒤편 구릉지 밭에도 당초문 암막새기와와 연꽃무늬 수막새 등의 와당과 함께 건물주초석들이 보였다. 틀림없는 고려시대 절터인데 이미 택지개발공사는 시작되어 마을은 다 철거되고 주변에 중장비가 들어와 파헤치고 있었다. 그날이 1984년 11월 29일이었다. 흥덕사지 절터를 처음으로 확인한 날이고 나의 일생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날이다.

비오는 날, 나홀로 찾은 금구

급한 마음에 우선 충북도청 담당부서에 전화를 걸어 현장의 상황을 알렸다. 새로운 절터를 찾았는데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며칠 지나면 없어질 것 같으니 조치를 취해 달라고 하였다. 그날 통화를 잊을 수 없다. 문화재 담당 공무원으로부터 왜 잘 진행되고 있는 택지개발 공사를 방해하려 하느냐고 전화상으로 엄청 욕을 얻어먹었다.

필설로 다하기 어려운 욕설이 오고가는 등 우여곡절 끝에 공사를 중지하고 발굴을 하게 되었다. 발굴조사는 1985년 7월부터 10월까지 약 3개월 동안 하였는데 그 해 여름에 태풍이 4차례나 불어와서 발굴현장이 엉망이 되어 작업이 자주 중단되고 발굴구덩이에 고인 물을 퍼내느라 엄청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 흥덕사 금구

어쨌든 예정된 기간에 맞추어 절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거의 마무리되어 갈 무렵인 10월 8일 ‘흥덕사’명 금구(禁口)를 수습하였다. 그날이 월요일이었는데 마침 아침나절까지 비가 내려서 발굴에 참여하는 인부와 학생들이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나 홀로 현장에 설치한 비닐천막을 지키고 있었다.

아침을 라면 1개로 대충 때우고 천막 안에서 유물과 장비들을 정리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전 10시쯤이 되니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이 맑게 개어 소일삼아 발굴현장 주변을 조사하던 중에 뜻하지 않게 금구 조각을 발견한 것이다. 금구는 금고 또는 반자라고도 하는데 사찰에서 쓰는 법구로서 지금도 절에서 공양시간을 알리는데 사용하는 청동으로 만든 쇠북이다.

그날 발견한 금구는 전체의 5분의 1 정도만 남아 있는 파편이었지만 택지개발공사장 도로에 트럭이 오가면서 파인 웅덩이에 고인 흙탕물로 금구를 씻어 보니 옆면에서 “갑인오월 일 서원부흥덕사금구일좌(甲寅五月 日 西原府興德寺禁口壹座)”라 새긴 글씨가 선명하게 나타났다. 이는 단순히 절 이름을 찾은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지」를 인쇄한 장소를 확인한 것이다. 그날 금구를 든 손에서 느껴지는 전율과 희열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당시는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발굴 현장에서 한참 떨어진 사직동 변전소 부근의 공중전화부스를 찾아가 발굴조사단장인 김영진 교수님께 금구 발견사실과 금구에 새겨진 명문을 전화상으로 보고하였다. 이튿날 김 교수님은 직지 영인본을 들고 현장에 오셔서 이곳이 「직지」를 인쇄한 장소임을 확인하고 급히 언론에 배포할 보도 자료를 만드는 한편 언론사에 전화를 걸어 다음날 현장에서 브리핑이 있을 예정임을 알렸다. 10월 10일 언론에서는 대서특필하였고 문화재관리국은 흥덕사지를 긴급히 사적으로 가지정하였다가 후에 문화재위원회를 거쳐 정식으로 사적 315호로 지정하였다.

▲ 흥덕사

절터 보존 요청 1달만에 공사 중단

1985년 10월 흥덕사지 발굴소식이 전해지자 충북도는 물론 학계와 문화계가 분주해졌음은 물론이고 택지개발공사를 담당하고 있던 한국토지개발공사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이미 택지개발사업을 시작해 공사를 진행하던 중에 난데없이 절터를 발굴하여야 한다고 하여 공사를 중지하고 발굴비용까지 대줬더니 이제는 보존하여야 한다고 하니 그들로서는 황당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흥덕사지와 「직지」가 연일 언론에 보도되고 청주가 고인쇄문화의 메카로 부각되니 억울하기 짝이 없었겠지만 보존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1만여 평을 사적지로 보존하였다가 일종의 여론몰이도 작용하여 후에 사적지 면적이 두 배로 늘어났다.

전국적으로 수없이 많은 발굴조사가 실시되고 있지만 발굴된 유적과 유물의 가치가 아무리 높아도 해당지역 전체가 보존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어서 흥덕사지도 발굴이 끝나는 대로 택지공사가 계속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흥덕사라는 절 이름이 밝혀졌다고 해도 그곳이 「직지」를 인쇄한 곳이 아니고 단순히 절 이름만 확인한 것이었다면 발굴이 끝나자마자 택지공사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흥덕사지 발굴로 인해 직지의 인쇄처가 확인된 것이므로 그 역사적 가치가 특별했던 것이다.

흥덕사지가 보존되어 청주를 상징하는 사적지가 된 마당에 숨기고 싶지만 사실대로 밝히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1984년 11월 29일 필자가 처음 흥덕사지를 발견하였던 그 날은 절터가 전혀 훼손되지 않고 온전하였다.

▲ 직지동판

충청북도에 절터 보존을 전화로 요청하고 다시 사진과 평판측량을 첨부한 공문으로 접수시킨 후 행정조치가 이루어졌는데, 시행사인 한국토지공사에 공문이 시달되고 다시 시공업체와 하청업체에 공문이 전해지는 과정에 한 달 정도가 소요되면서 택지공사가 그대로 진행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절터가 절반 가까이 훼손된 상태에서 발굴을 하게 되었다.

그나마 천만다행이랄까 절터 중심부에 문화유씨의 묘소 1기가 있었는데 묘소 이장이 늦어지는 바람에 묘소 바로 앞까지 흙을 파내어 가고 묘소 안쪽은 원형이 살아남았다. 발굴을 해보니 절터는 이미 대각선으로 길게 3분의 1쯤 잘려나간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묘소가 정확히 금당의 중심 즉 불상이 안치되었던 자리에 묘광을 파고 시신을 매장하였던 것이다.

후에 지도위원으로 발굴현장을 찾은 진홍섭 교수가 ‘산 자가 훼손하는 유적을 죽은 자가 지켰다’고 하신 말씀이 지금도 귓전에 맴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위기일발의 순간에 절터를 찾아 발굴을 하고 오늘날 사적으로 보존하게 된 것은 내 생애 최고의 보람이면서도 발굴 전에 일부 훼손된 일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특별지원금 효과

흥덕사지는 발굴조사 이후 철조망으로 둘러친 채로 한동안 방치되었다. 흥덕사지 언론발표와 동시에 보존정비 및 고인쇄박물관 건립을 관계기관에 요구하였지만 넉넉하지 못한 지방재정으로는 즉시 추진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이때 큰 도움을 준 사람이 전두환 대통령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경부고속전철 건설을 계획하고 고속철도 선진국들과 접촉하고 있을 때인데 가장 적극적이었던 나라가 프랑스였다. 프랑스 떼제베의 기술도입을 위해 전 대통령이 프랑스를 방문하였고,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엘리제궁에서 한국 대통령을 맞이하면서 깜짝쇼 하듯이 「직지」 원본과 신라 혜초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 원본을 보여주었다.

이 뉴스를 접한 관계당국은 초비상이 걸려 바로 다음날 이원홍 문공부장관과 김원용 문화재위원장이 청주에 내려와 나의 안내로 현장을 둘러보았고, 노건일 충북지사도 여러 차례 흥덕사지와 출토유물이 보관된 청주대박물관을 방문하였다. 외국 대통령의 외교적 특별배려로 「직지」를 친람한 대통령의 귀국 후에 특별지원금이 내려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이로써 절터의 정비와 고인쇄박물관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흥덕사지의 발굴조사는 택지개발 과정에서 일부 훼손되는 등 아쉬움이 있었지만 정식 발굴조사를 통하여 가람배치의 위치와 원형을 어느 정도 확인하였다. 남북일직선상에 중문·탑·금당·강당이 배치되고 이들을 감싸고 회랑이 돌아간 전형적인 단탑가람형이며, 금당과 강당의 기단은 통일신라시대의 가구식 기단과 적심석으로 추정되어 흥덕사지의 창건이 이미 통일신라 서원경(西原京) 시기에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흥덕사지가 직지의 재탄생 알려

흥덕사지 발굴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직지를 재탄생시켰다는데 있다. 주지하다시피 「직지」는 백운화상의 제자인 석찬과 달잠이 스승의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펴기 위해 묘덕의 시주를 받아 책을 만들면서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처음 탄생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불교의 쇠퇴로 직지는 자취를 감춘 채 세상 뒤로 숨었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 체결된 후 초대 주한대리공사로 부임한 꼴랭 드 쁠랑시가 우리나라의 고서 및 각종 문화재를 수집해 프랑스로 가져간 유물 속에 직지가 포함되었고, 1901년 모리스 꾸랑이 저술한 「조선서지」에 직지가 소개되어 세상에 다시 알려졌다. 따라서 직지는 1900년 이전에 조선의 어딘가에서 수집되어 프랑스로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1년 드루오호텔에서 경매로 쁠랑시 유물을 매각할 때 우리나라에서 수집해간 대부분의 고서는 모교인 동양어학교에 기증하였으나, 「직지」는 앙리 베베르가 180프랑에 구입하여 소장하였다. 그 후 1950년경에 그의 유언에 따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됨으로써 정부기관의 소유로 바뀌었다. 그리고 박병선 박사에 의해 직지의 존재가 확인되고, 1972년 유네스코가 정한 “책의 해”를 기념하여 개최된 도서전시회에 출품되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직지」가 국내에 알려진 후 국사 교과서에 수록되는 등 한동안 떠들썩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관심이 낮아지고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그러한 시점에 1985년 흥덕사지의 발굴은 꺼져가던 「직지」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특히 청주 지역사회에서는 「직지」의 부활을 성대하게 맞이하였다.

역사에서 만일이라는 말은 금기이긴 하지만, 만일 흥덕사지가 발굴되지 않았다면, 「직지」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이역만리 머나먼 낯선 땅 프랑스의 국립도서관 수장고의 어둡고 깊숙한 방에 그대로 잠들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흥덕사지 발굴은 「직지」의 부활과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이끌어낸 서광이었음에 틀림없다. 흥덕사지의 발견과 발굴, 「직지」의 부활, 세계기록유산 등재 등 일련의 과정들이 극히 우연적이고 드라마틱한 면이 있지만, 역사를 사필귀정이라 하면 이러한 모든 일들이 역사문화의 도시 청주이기에 가능하였던 필연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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