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200필 관리하며 주변 16개 역 관할한 청주 대표 문화유산

율량동 중리마을 찰방집 1992년 소실, 2008년 역터 발굴조사
건물터 9곳, 연못터 2곳, 우물 등 발견했지만 다시 땅에 묻어

본 글은 청주문화원이 발간한 청주문화 30호에 실린 ‘청주이야기 열마당’ 가운데 강민식님의 기고문을 전재한 것이다. 전재를 허락해 주신 필자와 청주문화원측에 감사드린다.

강 민 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실장

옛 율봉역 자리는 청주시 청원구 율량동 395번지 일원이다. 지금은 택지로 조성하면서 공원으로 꾸며놓았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중리라 불리던 마을이 있었다. 이곳 앞은 예비군 훈련장 가는 길로 기억하는 이가 많다. 또 율량천을 따라 상리로 통하던 길이었다. 옛 기록에 보면 상당산성을 일러 율봉역 뒷산이라 하였다. 상당산성 서쪽 성벽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지금은 한적한 길을 찾는 등산객이 몇몇 보이지만 예전엔 상당산성과 율봉역을 연결하는 지름길이었다.이제 율봉역 터는 옛 흑백사진 속의 건물 한 동과 발굴조사를 통해 얻은 제원뿐이다. 율량동 지명의 뿌리이며, 충북을 대표하는 옛 역(驛)의 자취를 찾아보자.

▲ 1992년 화재로 소실되기 이전 ‘찰방집’으로 전하는 율봉역 건물.

도(道)를 아십니까? 광역시나 자치시를 제외하면 여전히 광역자치단체는 도(道)를 단위로 한다. 도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길’이란 의미가 크다. 옛 기록에 보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다음 전국을 9주州로 나누었는데, 좁게는 한 읍의 이름이고 크게는 지금의 광역 행정단위를 말한다. 고려 때는 양광도니 충청도니 하는 이름이 처음 불려졌다. 조선시대도 마찬가지다. 처음 길을 따라 서울과 지역을 다스렸던 자취였다.

자연 길은 단순히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통로일 뿐 아니라 통치의 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전통시대 길을 장악하는 것은 중앙집권체제의 근간이었다. 이 길을 따라 조세가 오가고, 역사의 현장에선 충(忠)과 역(逆)이 결정되곤 하였다. 전통시대 길에는 마디마다 참(站)과 역(驛)을 두었다. 위로부터 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장치였으며, 아래로부터 수취를 원활히 하기 위한 제도였다. 따라서 길을 유지, 관리하는 정도에 따라 중앙집권화의 완성도를 엿볼 수 있다.

진천에서 옥천, 영동까지 관할

청주에는 인근 16개 역을 관할하던 율봉역이 있었다. 지금은 자취를 찾기 어렵지만, 고을 북쪽 7리에 있었고, 관리로는 찰방(察訪)이 있었다. 진천현의 장양(長楊)과 태랑(台郞), 청주목의 쌍수(雙樹)와 저산(猪山), 청안현의 시화(時化), 문의현의 덕유(德留), 옥천의 증약(增若)과 가화(嘉和) 토파(土坡) 순양(順陽) 화인(化仁), 영동현의 회동(會同), 황간현의 신흥(新興), 보은의 원암(元[原]巖) 함림(含林), 회덕현의 전민(田[貞]民) 등이다. 전체 41개 역로의 하나로, 서울에서 경상도 성주로 통하는 주요 간선로의 지선에 해당한다. 죽산에서 갈라져 진천과 청주, 황간을 통해 추풍령을 넘는 길이었다. 다시 청주를 중심으로 청안, 문의, 회덕으로 이어지는 노선이다. 율봉역의 관할은 인근 군현을 아우르는 매우 넓은 지역이었다.

가까운 충주목에는 간선로상에 연원역(連原驛)이 있어 14개 역을 담당했다. 조선 초인 세조 때는 한때나마 연원도와 합쳐 율봉도라 하고 경기충청우도찰방이 이를 맡게 하였다. 그러나 관할 지역이 넓어 곧 폐지되고 말았다. 율봉역에는 종6품의 찰방이 관찰사의 지휘를 받아 16개 역을 관할하였다. 나아가 찰방은 이름에서 보듯 일종의 감찰 임무를 띠고 있었다. 역로를 따라 오가는 사람들을 감시함은 물론 지방관들을 규찰할 수 있었다. 조선 중기 들어 찰방에 주로 문음(門蔭)으로 관직에 나아간 이들이 주로 임명되었으나 청주는 문과 급제자의 자리였다. 청주목사에 주로 음직자들이 임명된 것과 비교된다.

암행어사와 찰방 유기적인 관계

역의 사무는 역리(驛吏)들이 주로 맡았던 까닭에 찰방의 임무는 지방관 규찰뿐만 아니라 역리의 쇄환과 진휼, 역마의 관리도 맡겨졌다. 특히 각 도의 진상과 조세의 수송 감독도 맡았다. 따라서 업무가 과중한데 따른 문제와 함께 승진을 위한 뇌물과 분경, 역리에 대한 수탈과 횡령, 나아가 백성에 대한 침학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찰방을 감독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질 정도로 그들의 임무와 권한은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선 초에 명망 있는 관리를 파견하던 것이 점차 음직자의 전유가 되면서, 문과 급제자보다 일찍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는 통로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편 암행어사가 지방관을 제압하기 위해 역졸들을 동원하는 것을 보면 어사와 찰방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사가 지방을 규찰하기 위해 파견되면 찰방의 도움을 받아야했으니, 실제 암행이란 표현과는 달리 이들의 행동거지는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전하는 많은 소지류 등에 암행어사의 마패가 찍힌 예가 적지 않은 것은 그들의 출두를 미리 알고 준비했던 것을 방증한다.

조선 후기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전하는 율봉역은 찰방 1인과 노 708구, 비 803구 그리고 3등마 200필 내에 상등마 31필, 중등마 78필, 하등마 91필 등이다. 충청도 내 인근 찰방역과 비교하면 다음 표와 같다. 율봉역의 노비 수는 다른 역에 비해 적으나 말은 월등히 많았다.

발굴조사로 밝혀진 역 터의 자취

옛 율량동 중리마을은 율봉역 터로 알려져 왔다. 마을 주민들은 1992년 화재로 불탄 기와집을 ‘찰방집’으로 기억하고 있다. 2008~2009년 발굴조사를 통해 건물터 9곳과 연못터 2곳, 담장터와 우물을 확인하였다. 조선 후기의 지도 중 1872년 지방도만 3동의 기와집을 그려 넣었고, 나머지는 모두 1채의 기와집만 보인다. 이에 앞서 2004년 지표조사 당시 찰방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원 소유자인 고 박종원씨의 부인 이순이(당시 53세, 청주시 율량동 350-1)씨의 말에 따르면, 현재 이 지역은 땅의 소유주는 바뀐 상태이고, 건물 한쪽에 창고가 붙어 있는 목조가옥으로 1992년 화재로 인하여 전소될 때까지 사람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현재 가옥이 있던 자리는 가설물인 천막이 설치되어 있는 상태이며, 그 주변으로 밭 일대에 기와편과 자기편 등이 흩어져 노출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에 앞서 율봉역 찰방 이구징(李耉徵), 1609~1688의 <찰방해유察訪解由> 문서가 공개되었다. 찰방이 교체될 때 작성한 해유문서는 가로 270㎝, 세로 40㎝ 크기로, 찰방 이구징이 1660년(현종1) 3월 율봉도(栗峯道) 찰방에 부임해 8월에 교체된 사실을 적어 충청도 관찰사에게 보낸 것이다. 이구징의 본관은 경주로, 1639년 진사시에 입격한 후 1657년(효종8) 문과에 급제하였다. 율봉찰방을 거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688년 80세에 부호군에 오른 후 졸하였다. ‘죽헌문집’ 3권이 전한다. 찰방해유 문서에는 당시 율봉역 건물의 내역이 자세하다.

‘해유문서’에 역리 240명 기록

1660년 당시에는 모두 89칸의 건물이 있었다. 한편 1992년까지 남아있던 찰방집으로 전하던 기와집의 사진이 전하는데, 위 표의 칸 수와는 크게 다르다. 2008~2009년의 발굴조사에서는 9동의 건물터를 찾았다. 그 중 5호 건물지는 정면 4칸, 측면 3칸(9×7.5m) 규모로 사진 속 건물과 가장 유사하다. 기둥 사이의 간격은 정면 2.25m, 측면 2.5m이며 6호 건물지와 일부 중복된다. 또한 네모꼴 연못 두 곳과 우물터를 확인하였다. 1호 연못은 건물터 가까이에 있으며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이라 한다. 크기는 9.6×6.75m이다. 건물터 남쪽으로 20여 m 떨어진 2호 연못은 1970년대까지 있었다는 주민의 제보가 있으며, 사다리꼴로 최대 24.5×18m의 크기이다. 가운데는 지름 10m의 섬을 만들었다. 두 연못 중간에는 지름 80~86cm의 둥근 모양의 우물이 있다. 아래쪽 지름은 95cm로 밑으로 가면서 넓어지는 형태이다. 남아있는 깊이는 1.7m이다. 연못은 경관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소화전의 역할도 겸하였다. 마침 율봉역에 있었던 연못을 읊은 서거정(徐居正1420~1488)의 시가 전한다.

▲ 발굴조사로 밝혀진 율봉역 건물터와 연못들./ 제공=중앙문화재연구원

율봉역에 제(題)하다.
은하수는 반짝반짝 달빛은 나지막하고 耿耿銀河月欲低
작은 누각 서쪽으로 연꽃은 만발했는데 藕花開盡小樓西
미인이 자고 일어나 이별 인사 나눌 제 美人睡起話離別
철적 한 소리에 마음이 더욱 헷갈리네 鐵笛一聲心轉迷

옛일을 생각하여 서원(西原)의 율봉역에 제(題)하다.
보리는 막 배동 서고 매실은 이미 열렸는데 壟麥初胎梅已仁
강남의 나그네 걸핏하면 마음이 상하여라 江南行客動傷神
작은 못에 여전히 연꽃은 깨끗이 피었건만 小塘依舊荷花淨
당시 술 권하던 사람은 볼 수가 없네 그려 不見當時勸酒人

해유문서에 전하는 율봉역이 관리하는 역마는 모두 134필. 그밖에 역리 240명 내 하리(下吏) 43명·지인(知印) 16명, 역노 102명, 역비 30명 등이다. 그런데 1686년(숙종12) 11월 9일 ‘승정원일기’의 율봉역 역마는 크게 늘었다. 이때 상등마 30필, 중등마 67필, 하등마 75필로 모두 172필이다. 원래 2백필이 정수이나 난을 겪은 후 복구되지 못했다고 한다.

한편 1871년의 ‘호서읍지’에 전하는 율봉역을 포함한 17참역의 마필은 모두 219마리였다. 상등마는 29필, 중등마 74필, 별중등마 2필, 하등마 78필이다. 17세기 후반에 비해 다시 늘어난 수치이다. 원래는 상등마 5필, 중등마 8필, 하등마 21필이라 하였는데, 어떤 근거인지 분명치 않다.

공원으로 바뀐 율봉역 터

현재 율봉역 터의 자취는 찾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의 옛 관아건물을 옮겨지었다는 건물의 부재를 옮겨 복원한 한옥 한 채만 눈에 띤다. 담장 앞쪽에 율봉역 터에 남아있던 선정비를 옮겨놓았다. 율봉역은 옛 청주목의 주요 관청으로 지방행정과 교통체계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유산이었다. 1992년 화재로 소실한 건물의 사진과 증언이 남아있고, 최근의 발굴조사를 통해 율봉역 건물터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택지개발 과정에서 옛 터는 땅 속에 묻히고 지금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건물만 옮겨놓은 상태다.

▲ 율봉역 터 가까이에 옮겨 놓은 관아건물. 그 앞에 선정비가 보인다.
▲ 옛 율봉역 자리에 새로이 조성한 통신학습광장.

음직자가 주로 부임한 청주목사에 비해 다른 지역과 달리 문과 급제자가 임명된 율봉역 찰방은 지역 구도를 이해하는데도 유효한 자료이다. 또한 해유문서가 전하고 있어 17세기 후반의 상황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주변 16개 역을 관할하던 율봉역은 청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지만 이제 기록 속에만 찾아볼 수 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제원이 밝혀졌지만 개발의 논리 속에 다시 땅에 묻히고 말았다. 도심 속 병영과 청주목 관아의 복원이 요원한 현실에서, 제 모습을 밝힌 유적마저 되살리지 못한 채 문화유산에서 도시의 상징성을 찾는다는 주장이 공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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