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생각한다/ 이재표 청주마실 대표

▲ 이재표 청주마실 대표

귀를 의심했다. 청와대는 2015년이 저무는 12월31일, 일본정부와 벌인 위안부협상 결과에 대해 자평하면서 분명 ‘난제(難題)’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대국민 메시지를 인용하자면 “한일관계의 가장 까다로운 현안문제로 남아있던… (중략) 이 문제는 손대기도 어렵고 굉장히 힘든 난제였다”는 것이다. ‘난제’는 말 그대로 ‘풀기 어려운 문제’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위안부 문제가 누구를 위해서 풀어야할 문제이고, 누구에게 풀기 어려운 문제냐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전 세계가 ‘전쟁제국주의’의 시대에 휩쓸리면서 우리도 일제강점기를 겪어야했다. 그리고 광복 후 20년이 흐른 1965년, 우리는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한다며 한일협정을 체결했다. 현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 정부 시절의 일이다. 당시 우리나라가 일본정부로부터 받은 것은 배상이 아닌 ‘독립축하금’ 명목의 무상차관 3억 달러였다.

미(美) 국립문서보관소 기록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의 민주공화당은 한일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 일본기업으로부터 6600만 달러의 불법정치자금을 받았다. 차관의 5분의 1의 넘는 뒷돈을 챙겨 통치자금으로 썼다는 얘기다. 이로써 우리는 배상청구권을 상실한 것이다. 협잡의 과정에서 협상의 막후 김종필은 “독도를 폭파해 버리자”는 제안까지 했다.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 것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이 나온 1991년 이후다. 일본은 한일협정으로 배상문제가 마무리됐으므로 공식사과도, 국가배상도 할 수 없다고 버텼다. 다행스럽게도 위안부 문제는 한일협정 과정에서 논의조차도 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참여정부 들어 비로소 ‘한일협정과 무관하게 일본에 개인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도 각각 “한일협정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 “위안부 피해자 청구권에 대해 정부가 외교적 노력을 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피해자 지원을 위한 재단에 일본 측이 10억엔(약 97억원)을 지원한다’는 조건으로 협상을 서둘러 마무리했다. 협상 후 아베 총리는 “일본국 내각 총리대신으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심신에 걸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에 대한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전했다. 위안부 운영 주체가 국가였고, 국가가 저지른 반인륜적 만행에 대한 사죄는 없었다. 더구나 아베의 부인은 그날, 전범들의 위패를 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해 우리를 조롱했다. 정통성이 결여된 정권이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정상화(?)하고자 했던 그들만의 한일관계가 비로소 마무리된 것이다.

대신 우리나라는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의 위치를 옮기고 더 이상 국제사회에서 일본을 비난하지 않겠다고 약조했다. 결국 ‘난제’란 가해자가 진정한 사죄를 하지 않고 적반하장 격으로 ‘더 이상 우리를 비난하지 마라, 우리 죄를 기억하게 만드는 상징물을 치우라’고 말하는데, 피해자의 의견도 구하지 않고 개인의 배상청구를 무력화시키는 일이었다. 일본의 난제를 우리의 난제로 고스란히 떠안은 셈이다.

일제가 동원한 군 위안부는 수십만 명에 달했으며 그중 대부분이 자살하거나 살해됐고, 70년 이상 세월이 흘러 현재 46명만 생존해 있다. 이제 와서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범주는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충북에 생존해 있는 위안부는 올해 아흔 살을 맞는 이옥순 할머니가 유일하다. 이 할머니는 차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어 70년을 속리산 자락에 의지해 살고 있다.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 이후 매일 태극기를 게양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2009년에는 모아둔 2000만원을 지역 인재양성을 위한 장학금으로 내놓기도 했다. 피해자 동의 없이 받을 일본돈 10억엔은 할머니들을 또 다시 능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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