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않는 괴물이 가장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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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않는 괴물이 가장 무섭다
  • 충청리뷰
  • 승인 2015.12.24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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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고 무서운 얘기가 가득한 서정오의 <꽁지 닷 발 주둥이 닷 발>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오혜자 청주시작은도서관협의회장

▲ 꽁지 닷 발 주둥이 닷 발 서정오 지음. 보리출판사 펴냄.

사라진 문화이지만 지금 어른들의 어린 시절만 해도 겨울날 긴 밤에는 밤참처럼 옛날이야기 한 자락 씩 듣는 것이 빼 놓을 수 없는 재미였습니다. 옛날 옛날에~ 하고 시작되는 이야기들은 어떤 이야기라도 귀를 쫑긋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래된 시간 만큼이나 삶의 깊이를 담고 있는 이야기가 어찌 그리 흥미진진한지 한 번 시작되면 끝이 날 때까지 숨을 죽이고 듣게 됩니다. 몇 번이고 같은 이야기를 또 해달라고 조르던 생각도 납니다. 요즘 아이들은 옛날이야기도 책으로 읽으니 구수한 입말로 듣던 것과 같은 맛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많이 읽고 이야기의 재미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옛이야기 책은 어른들에게 먼저 권하고 싶습니다. 어른이 되어 다시 마주하면 아이 때 들었던 느낌과 많이 다르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들려줄 무섭거나 우스운 이야기들 몇 개 외우고 있으면 쓸모가 많습니다. 요즘 아이들에게도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른은 좀 먹히는 편입니다.

<꽁지 닷 발 주둥이 닷 발>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때의 ‘발’은 길이를 잴 때 두 팔을 펴서 벌린 길이를 말하는데 닷 발이라 하니, 칠 팔 미터가 넘는 꽁지와 부리를 가진 아주 커다란 새를 말하는 가봅니다. 부리가 이렇게 길다면 몸집도 크고 무시무시한 모습일 것 같습니다. 이 커다란 새가 나무꾼 총각의 어머니를 채갔다고 이웃사람이 전합니다.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난 나무꾼은 옛이야기의 전형적인 방식에 따라 논에 모를 심어주고, 산비탈 고추밭에 김을 다 매주고, 집 짓는 까치에게 벌레를 잡아다주고, 다람쥐에게 상수리를 주워다 주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아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얻습니다.

사람과 동물 모두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노동이 있고 이 일을 돕거나 함께 하면서 신뢰를 얻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삶의 방식입니다. 특히 옛이야기에는 동물의 신뢰를 얻는 사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나무꾼 총각은 노동으로 얻은 볏짚 태운 재와 고춧가루와 도꼬마리와 삭정이를 활용하여 꽁지가 닷 발이고 주둥이도 닷 발인 커다란 새를 죽이고 동굴 속 큰 집에 갇힌 어머니를 구해 집으로 돌아와 잘 살았답니다.

매일 괴물들과 싸우고 있는 현대인들

마법 판타지나 게임캐릭터로 등장할 법한 무시무시한 이 새는 어떻게 옛이야기 속에 등장하게 되었을까요. 난관을 헤쳐 나가는 방식이 다른 옛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반면 도깨비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커다란 새 이야기는 낯설기도 하고 갑작스럽기도 합니다. 익숙하지 않은 어려움. 겪어보지 않은 불행. 새는 하늘을 상징하므로 아마도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나 질병 혹은 불운한 사고 같은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다가온 불운한 상황에 대처하는 옛이야기의 방식이 주목할 만합니다. 재와 고춧가루와 도꼬마리와 삭정이들은 각자 삶 속의 일상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입니다. 볏짚이나 삭정이를 태우는 것과 붉은 고춧가루는 액운을 막는 행위나 색깔을 상징합니다. 도꼬마리의 뾰족하고 따가운 털도 탱자나무를 울타리로 삼았던 것처럼 나쁜 기운을 막아준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겠지요. 여우누이가 쫓아오지 못하도록 하얀 병을 던지니 가시덤불이 막 자라난 이야기와 같습니다. 이런 보잘 것 없는 재료들로 통쾌하게 괴물을 무찌르지요.

현대사회에서는 영화관마다 게임마다 등장하는 괴물체와 많은 사람들이 싸우고 있고, 매일매일 지구촌뉴스에 등장하는 사건사고에 쫓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쟁을 겪은 아이들이 ‘꽁지 닷 발 주둥이 닷 발’과 같은 시커먼 그림자가 덮치는 악몽의 경험을 그림으로 그린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괴물 옛이야기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무서운 모습으로 등장해 우리를 위협합니다. 꿈과 이야기와 현실을 구분하기가 점점 어렵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진 재난들은 마치 죽지 않는 괴물 같습니다.

옛날 옛적부터 전해 내려온 이야기 속에는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상황을 되돌리는 주인공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험난하지만 구체적으로 제시된 방법들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실행합니다.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하지요. 논농사 밭농사 성실하게 지으며 자신의 노동으로 살고 자연의 생명들과도 잘 돕고 함께 살아가라는, 그렇게 살기 정말 어려운 방법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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