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사회 읽기

Artist 2창수

▲ A Burial at Ornans, 315cm × 660cm, 1849-50, Musee d‘Orsay, Gustave Courbet.

“나는 천사를 그릴 수 없다. 왜냐하면 천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이러한 말이 역사에 기록되기에는 수많은 사람들 뜻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19C중반 프랑스는 여러 혁명을 성공한 유럽 문화의 중심이었다. 대 자본 부르주아세력은 부르봉 왕조를 축출하고 루이 필리프를 국왕으로 만든다. 1846년 프랑스에는 선거권을 가진 성년 남자가 3%에 불과했다한다. 결국 참정권을 가진 3%의 남자가 모든 국가의 행정을 좌지우지 했다. 평등한 법을 외치는 수많은 사람들 외침에도 프랑수아 기조(Francois Guizot)수상은 국민들에게, 부유해지는 법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면 참정권이 없다고 했다.

“부유하게 되라. 그러면 여러분은 투표권을 얻을 수 있다.”

당시 대 자본가는 권리를 독점하고, 소 자본가나 일반인은 권리를 받지 못했다. 미술도 시대에 맞는 낭만주의적 미술이 유행 하였다. 낭만주의는 ‘세계의 인식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며, 감각적 현실을 초월하여 관념 세계에 실체가 존재한다.’라고 주장 했다. 이러한 미술경향은 가상에 갇혀 현실을 미화하는 좋은 수단이 되었다. 사회적, 자본적 평등을 주장하기위해서는 미화된 것이 아닌 사실을 바르게 보려는 것이 필요했다.

구르베(Gustave Courbet, 1819-77)는 그림으로 당시 사회를 보여주려는 노력을 하였다. 사실이라는 현실을 그는 ‘오르낭의 매장’을 통해 보여 주었다. 사람들이 무엇을 본다는 것은 믿음과도 연결 되어있다. 일상의 평범함에도 역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 그림은 쿠르베의 고향 오르낭에서 1848년에 있었던 장례식을 실제 살던 주민들의 모습으로 거대하게 그린 것으로 미화하는 관념의 세상을 일상의 사실로 일격을 가한 것이다. 쿠르베는 사실적으로 그림을 잘 그려서 사실주의 작가로 이름을 높인 것이 아니다. 사실을 각색하지 않고 보려는 그의 가치관이 그를 훌륭한 작가로 만든 것이다.

의심생암귀(疑心生暗鬼) 라는 말이 있다. 의심이 생기면 없던 귀신도 생긴다는 것이다. 열자(列子), 설부편(說符篇)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어떤 사람이 도끼를 잃어버렸다. 누군가 훔쳐 간 것으로 생각되어 옆집 아이를 의심했다. 그랬더니 그 아이의 모든 행동, 말투가 영락없는 도끼 도둑과 같았다. 그러나 몇일 후 밭에서 다시 도끼를 찾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만난 옆집 아이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아이였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아도 편견 없이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쿠르베는 사실을 편견 없이 보려는 노력을 했고 미술과 사회의 연관에 대해 연구했다. 당대 시인 샤를 보들레르 등과 같은 당대의 작가 및 철학자들과 친하게 사귀었던 쿠르베는 사실주의를 이끌었다. 현실정치참여와 미술을 병행하였으며 기념물이 상징하고 있는 군국주의에 대한 혐오감이 있었다. 그의 그러한 성향으로 정치적 망명을 갈 수 밖에 없었지만 미술이 갖는 찬미를 넘어 사회 현실로 확장하려는 그의 노력은 결국 그를 인류사의 중요한 미술인으로 역사가 기록했다.

사실을 편견 없이 사실로 본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지식을 내려놓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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