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선생과 고하의 만남이 새삼스럽게 기억된다. 백범은 해방 후 임시정부의 대표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미군정에서 제공한 군용 비행기를 이용했다.
얼핏 앞뒤가 맞지 않으며 역사의 비틀림이 엿보이는 한 장면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동안 비록 창씨개명은 하였으나 교육문화사업과 사회운동 등에 전념하면서 국내에서 활동한 인사가 여럿 있었다. 몽양 여운형과 인촌 김성수가 있었고, 인촌의 죽마고우인 고하 송진우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해방 후 고하는 상해 임시정부의 대표인 김구를 실세로 인정하고 경교장을 방문,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은 대화로 장식한다.
고하: 백범선생님의 독립투쟁을 높이 평가하며, 광복 대한의 수반으로 이 민족을 이끌어주기 바랍니다.
백범: (묵묵부답)
고하: 정치를 하시려면 자금이 필요할 터인데 이 돈을 받아 주십시오.
백범: 친일파의 돈은 받을 수 없소! (하고는 내실로 들어간다.)
고하의 일갈: 나라를 경영하려면 국민의 세금으로 꾸려 가는데 그 돈에는 깨끗한 돈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평민과 요정의 기생일 지라도 이들이 낸 돈도 세금이다. 국민이 낸 세금이면 되는 것이지 출처를 따진다면 어떻게 국가를 경영하겠다는 것인가?
백범의 후일담: 조선에는 친일파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역시 고하가 있어 이나마라도 보존되었구나!
두 분의 주관과 아량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서로를 마음속으로 인정했는지는 몰라도, 후일 정치적인 만남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 후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죽임’의 비극이 시작되어 백범 김구, 고하 송진우, 설산 장덕수, 몽양 여운형 등이 암살되고, 끝내는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소박한 민초들에게까지 ‘죽임’과 ‘죽음’의 비극이 강요되었다.
고당 조만식, 일주 김진우, 시인 김영랑, 이주하 등은 전쟁 중에 비명횡사하였고, 우사 김규식, 조소앙, 인촌 김성수, 조선일보의 방응모 등은 납북된 후 생사가 묘연하다. 죽산 조봉암, 박헌영 등은 50년대에 각기 남과 북에서 재판을 통한 죽음을 맞았고, 최근까지도 사상계의 장준하, 서울대 법대교수 최종길도 의문사란 이름으로 거론되고 있으니 어둠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청계 정종녀 화백은 납북이냐? 월북이냐? 그 자식들은 오늘까지도 과거의 그늘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뿐이랴! 최덕신과 몽양의 딸자식은 70년대에 자진 월북하여 그 후손 또한 마찬가지 팔자이다.
좀 심한 표현일지는 모르나, 심산 김창숙은 유림, 백산 지청천은 정치, 일석 이희승은 한글, 미당 서정주는 문학, 운보 김기창과 청전 이상범은 화실, 김홍일은 오성장군, 두계 이병도는 역사학, 김준엽은 대학교수, 간송 전형필은 미술관 속으로 숨었다고나 할까?
제국주의 식민통치 대신 교조주의의 그늘아래 수많은 지식인들과 민초들은 목숨을 바치거나 빼앗겼고, 지조를 지키되 감추거나 친일 시비에 휘말려야만 했다.
남은 것은 우남 이승만과 김일성뿐이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과거이었나?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가?
대화로 풀면 될 일을 배짱으로 밀어 부치고 있으니 백범과 고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50여 년 전 두 분의 만남보다 나을 것이 조금도 없다.
여야 영수의 만남은 있으되 진솔한 대화의 결과가 없고 남-남(南-南)의 대화가 남남보다 어려우니, 또다시 이 땅에서 과거의 역사는 되풀이되어야만 하는가?
그러나 오늘을 사는 민초들에게 맺히는 눈물은 있으되,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음을 지도자들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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