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29일, 그날도 거리는 전과 다름없이 평온했습니다. 우리 역사상 가장 큰 치욕이 된 ‘한일 합방’이 공포되던 날이었지만 한성거리는 아무 일없이 조용하기만 했습니다.

 길목 길목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일본 순사와 헌병들이 늘어서서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습니다. 이튿날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모든 소란이 한성에서부터 시작되는데 한성이 조용하니 지방도 걱정할 것이 없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평온은 이미 1주일 전 창덕궁에서 열렸던 어전회의에서부터 예견되었습니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합방문제’를 논의하는 중차대한 회의였음에도 대신들 중 누구 한사람 반대의견을 말하는 사람 없이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던 것입니다. 장장 519년이나 지속돼 온 조선왕조는 그처럼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합방에 성공한 일본은 곧 바로 공이 큰 한국인들에게 논공행상을 했습니다. 왕족과 고위관리 76명에게 작위를 수여했고 일반관리 3559명, 양반 유생9811명에게는 은사금을 주었습니다. 또 재소자 1700명을 석방하고 3200명의 효자 효부 열녀, 7만902명의 과부와 노인들에게는 위로금을 주었습니다. 일본은 그처럼 선심을 씀으로서 민심을 회유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망국의 분’을 삭이지 못해 목숨을 끊어 항거한 이도 전국에서 45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선비 황현을 비롯해 금산군수 홍범식도 있었습니다. 나라가 망한 대가로 어떤 사람들은 원수로부터 돈과 명예를 얻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의분을 못 이겨 죽음의 길을 택했으니 백척간두에 선 나라의 운명 앞에 같은 민족이 보인 두 모습은 그렇게 달랐습니다.

 과거에 급제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고향인 전라도 광양에 묻혀 살던 매천 황현은 합방소식이 전해지자 참담한 심정으로 “나는 나라가 망했다하여 반드시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그러나 나라에서 오 백년 간 선비를 양성하여 왔는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선비로서 한 사람 죽는 이를 볼 수 없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냐”는 유서와 절명시 4수를 남기고 분연히 자결했습니다.

 괴산 사람인 홍범식은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어지니 죽지 않고 무엇하리”라는 유언을 남기고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임꺽정’의 저자로 월북해 부수상을 지낸 벽초 홍명희의 아버지입니다.

 해마다 8월이면 우리는 빛과 그림자의 두 역사적 사실 앞에 서게됩니다. 하나는 해방의 기쁨이요, 하나는 망국의 치욕입니다. 35년의 사슬에서 해방된 그 기쁨이야 아무리 환호한다해도 지나침이 없고 나라를 빼앗긴 그 비통함 역시 아무리 통탄한 들 의분이 풀릴 리 없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8월 29일 ‘국치일’은 국민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캘린더에서조차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부끄러운 역사이기에, 아픈 역사이기에 숨기고 싶기 때문인가, 아니면 잊고 싶기 때문인가, 나는 그 심사를 알지 못합니다.

 일제식민지의 뼈저린 질곡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인구의 태반인 오늘 누구도 그 날의 비통함을 말하는 이 조차 없이 역사를 바로 세우겠다고 “오, 필승 코리아!”를 열창하고있으니 이 무슨 당착이요, 모순이란 말입니까.

 누군가 말했습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똑 같은 비극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다.” 설마 오늘 우리 국민들을 위해 한 말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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