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 읽기

성탄제(聖誕祭)
김 종 길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새 나도
그 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 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 시집 ‘성탄제’ (1969)

<허장무 글·이은정 그림>

바알간 화롯불이 놓인 방 안,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의 무릎에 누워 화자는 열이 많이 나네요. 어린 시절 참으로 따뜻한 삶의 유대공간입니다. 이윽고 아버지가 해열제로 쓰는 산수유 열매를 구해 오셨네요. 그것도 자식 걱정이 앞서 당신의 고통은 아랑곳없이 한겨울 눈 쌓인 산야를 헤치고 간신이 따오신 겁니다. 붉은 숯불과 산수유 붉은 열매가 뜨거운 육친의 사랑을 함축하고 있지요. 거기에 화답하듯 화자는 어린 짐승처럼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뜨거운 사랑 법을 알지 못합니다. 혈육 속에는 이렇게 마법의 등잔과도 같은 사랑이 흘러 아버지와 내가 마냥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열로 상기한 볼이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닿는 순간의 절묘한 냉온감각의 결합이야말로 사랑의 극치입니다. 그 날 밤이 축복처럼 눈이 내리는 은총의 밤이었다니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자 이제 여기서 과거회상에서 현재로 시상이 전환되지요. 어린 화자도 어느새 젊은 아버지만큼 나이가 들었습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핵가족 시대의 도래, 뿔뿔이 흩어진 가족사만큼이나 서러운 서른 살, 문명처럼 냉정한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 반가운 눈은 그날처럼 내리지만, 그때 그 아버지와 할머니는 세상에 살아계시지 않지요. 다만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에 새겨있는 육친에 대한 뜨거운 사랑만이 내 혈액 속에서 용솟음칠 뿐입니다.

혈육을 향한 사랑, 어떤 것도 이 땅의 육친의 사랑에 근접할 수 없지요. 왼새끼 꼬아 참숯과 청솔가지로 액운을 막으며 자식을 낳아 기를 때부터, 너무 소중해서 신명을 바쳐 수직으로 흐르는 사랑입니다. 나는 우연히 나로서 여기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요. 고결한 이름 아버지, 아들, 할머니, 손자, 그 침범할 수 없는 관계 속에 살아가던 따스한 삶의 유대공간은 지금은 전설처럼 잃어버린 낙원입니다. 눈 내리는 농가의 대가족을 비추는 작은 등불이,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으려고 오순도순 모여 앉아 식탁에 불을 밝히는 따뜻한 손길이 그립습니다. 누구의 삶이든 가족은 그 자체만으로 이미 뜨거운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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