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 읽기

설야(雪夜)
김광균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밑에 호롱불 야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의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 시집 ‘와사등’ (1939)
 

<허장무 글·이은정 그림>

문학 작품 속에 눈이 많이 내립니다. 톨스토이의 ‘부활’에서 카츄사를 따라가는 네플류도프의 머리 위에 슬픈 후회와 성찰의 눈이 하염없이 내리지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긴 터널을 빠져나가니 그곳은 눈의 나라였다.’로 시작됩니다.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에 내리는 눈은 죽음처럼 얼어붙은 공포의 눈입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에서는 쇼냐를 향한 지바고의 사랑의 열정과 도덕적 망설임 사이의 괴로움처럼 눈이 쌓이지요.

시에서도 박용래의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주막집 마굿간이나, 조랑말 말굽 밑이나, 여물 써는 소리 같은, 사라진 토속적 풍경 속에 내립니다. 이용악의 ‘그리움’이나 백석 시인의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에 내리는 눈은 북방을 배경으로 커다란 눈송이가 푹푹 쏟아지는 눈이지요.

김진섭 수필의 백미 ‘백설부’에는 ‘찬 돌과 같이 딱딱한 겨울날의 한가운데, 한없이 부드럽고 깨끗한 영혼이 소리 없이 내려와, 도회가 잠시 문명의 구각을 탈하고 현란한 백의를 갈아 입는다’고 표현하고 있고요.

김광섭의 ‘설야’에 내리는 눈을 보겠습니다. ‘소리 없이 흩날리’는 ‘희미한 눈발’이 ‘빛도 향기도 없이 내려서’ 쌓인다고 했습니다. 눈이 억누를 수 없는 격정으로 마구 쏟아지지 않고, 오래 동안 정화된 슬픔으로 차분하게, 과거의 추억을 되살리며 조용하게 내립니다.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처럼, ‘서글픈 옛 자취인양’, ‘잃어진 추억의 조각’으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내립니다. 그리고 ‘머언 곳의 어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내립니다. 시인의 천부적인 이미지 조형능력이 돋보이는 불후의 감각어들을 동원하고 있지요.

1930년대의 한 모더니스트가 만난 눈은 이렇게 지향 없는 그리움과 서글픈 추억이 담긴 낭만적 서정이 넘치는 눈입니다. 눈 속에 어리는 한 여인이 머언 곳에 있습니다. 차단한 의상을 하고 내려서 쌓이는 눈처럼 슬픈 추억도 쌓여, 잊지 못할 여인에 대한 추회 위에 가쁘게 설레입니다. 고요히 내리는 눈이 마치 신비한 빛과 향기를 지닌 것처럼 환상적인 분위기마저 자아내고 있지요. 지극히 드러내지 않으면서 충분히 드러나는 애상적 정조가 찰찰 넘치는 시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창밖에는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서글픈 옛 자취인양’ 올해의 첫눈이 소리 없이 내리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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