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충동 가서 주먹자랑 말고 수암골 가서 쌈자랑 마라”…거센 삶 역설
한국 전쟁때 포로수용소 존재설은 실증자료 확인 안 돼

▲ 피란민촌에 세워진 대성주택 주문 박옥자(67)씨가 빨래를 지붕에 널고 있다. 검소하고 소박한 이곳 사람들은 작은 공간이라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할수 있는 지혜를 터득했다.
▲ 1986년에 촬영한 최정기 씨 모자 사진. 대성주택 찍은 에서 사직동 방향으로 촬영했다. 1986년 당시 사직동 방향의 동산에 공동묘지가 보인다.

수암골 토박이인 이은규(인권연대 숨 활동가)씨가 재밌는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예전 모충동 지역에 공동묘지가 조성돼 있었다고 했다. 그는 모충동은 수암골과 마찬가지로 피란민들이 많아 사람들이 드센 곳으로 유명했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말이 있었다고 했다. 이은규 활동가는 모충동 지역의 드센 기질을 두고 “청주 사람들아. 모충동 가서 주먹자랑 마라”는 말들이 많이 회자되었다고 했다.

수암골 토박이 출신인 그는 여기에 말 한토막을 더했다. 그는 “모충동 사람들아! 수암골와서 쌈 자랑 하지마라”는 말이 있었다고 했다.

한국전쟁당시 38선 이북 출신 피란민들이 주로 자리잡은 수암골 사람들이 더 드셌다는 것이다.

 

확인되지 않는 이야기

대성주택이 자리한 모충동 일대가 피란민촌이었다는 데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견이 없다. 문제는 포로수용소. 대성주택에 거주하는 주민들 중에 대성주택이 자리잡은 터가 “한국전쟁 당시 포로수용소가 있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포로수용소에 대한 진위여부는 잘 확인되지 않는다. 우선 모충동 포로수용소에 대한 문헌을 찾을 수가 없었다. 모충동 토박이 출신 사람들은 피란민촌이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해도 포로수용소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모충동장을 역임했던 이철희 흥덕구청장은 “피란민촌이 형성된 것은 맞다. 하지만 포로수용소가 있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다”고 밝혔다.

모충동 초대 시의원을 지냈던 연해영 모충동새마을금고이사장도 같은 의견이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조산(해뜨는산) 비탈을 따라 피란민들이 집을 지어 생활했다. 이후 대성주택을 지을 당시 산봉우리를 허물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당시 포로수용소와 관련된 문헌에도 청주의 포로수용소 이야기는 거론되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전정 이전에 영운동에 피란민 수용소가 있었다. 충북지역 원로 언론인인 김운기씨는 이같은 사실을 증언했다.

그는 청주시문화산업재단이 2013년 발행한 성안길 토박이 구술 자료집 ‘청주약국 앞 홍문당, 홍문당옆 청주뻬까리’에서 다음과 같이 구술했다.

“1947년 2월 청주 청남초등학교 뒤 야산에 있던 영운동 수용소에 1주일 정도 수용을 했어요. 말집같이 일자로 지어가지고 방 하나, 부엌 하나 이렇게 방을 하나 줘 가지고 있었어요. 거기서 인제 추럭이 와가지구. 담요 한 장씩 주더라고. 담요를 뒤집어 쓰고 추럭에 타고 남이면 가서 내렸어요. 그러니까 면장이 ‘이 엄동 설한에 이 사람들이 여기서 뭐 먹고 살으라고 내보냈냐고. 우린 여러분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하룻밤 재워 줄테니까 수용소로 다시 돌아가라’고 해서... 영운동 수용소 갔더니 ‘우린 한번 내보내면 다시 받을 수 없다’고”

그는 같은 책에서 “1.4 후퇴때 중공군이 쳐들어와서 아군들이 후퇴를 했으니까 여기(청주)를 왔지. 처음엔 수용소가 없었어. 처음에 배급을 받았는데 하루 식량의 반 정도. 옷도 받았는데 옷도 안맞는 것도 있고. 옷을 52년도까진 주더니 53년 되니깐 배급이 줄더라구. 피란민은 많고 주는 양은 적어진 거지”라고 말했다.

김 씨의 말처럼 당시 통계를 보면 전쟁 전 청주 본터 인구가 6만명 인데 피란민들이 2만 명 정도였다.

피란민들의 삶은 곤궁 그 자체였다. 곤공은 피란민들은 드세게 만들었다. 시간의 흐른 현재 수암골이나 모충동에서 피란민 1세대를 찾기는 힘들다.

이제 드센 삶의 터전 위에 세워진 집과 골목길과 신화같은 이야기만 남긴 채 대성주택은 종착역을 향해 달린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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