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편에 선 대가는 가난과 울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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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편에 선 대가는 가난과 울분뿐…’
  • 홍강희 기자
  • 승인 2004.08.26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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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충북지부 회원 123명, 교육 못 받아 뚜렷한 직업도 없어

연금 받지만 최저생계비 못 미쳐, “친일파 진상규명 반드시 이뤄져야”

 청주시 봉명동 학천건강랜드 뒤쪽에는 광복회관이라는 4층짜리 건물이 있다.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했거나 그 자손들로 이뤄진 광복회충북지부(지부장 오상근) 회원 123명의 사랑방인 셈이다. 광복 이전에 작고한 독립유공자는 손자까지, 그리고 광복 이후 작고한 독립유공자는 아들까지 회원이 될 수 있다. 김백호 사무국장(67)은 이들을 수권자라고 표현했다.

 김국장은 “독립유공자가 작고하면 배우자나 아들, 손자 중에서 1명만 수권자가 될 수 있다. 배우자가 1순위이고, 그 뒤를 자녀가 잇는다. 자녀는 모두 해당되지만 손자로 내려오면 장손자만 수권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규정에 손자라고 돼있어 모든 손자가 받는 것으로 곧잘 오해 한다. 이것도 고쳐야 할 대목”이라고 말했다.

 현재 도내에 생존해 있는 독립유공자는 모두 5명이고 대부분 유족들이 광복회를 구성하고 있다. 독립유공자 본인과 자녀들은 이미 80세가 넘었거나 근접해 있고, 유공자의 손자일 경우도 50세 이상이어서 회원들은 대부분 노년층이다. 그러다보니 젊어서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뚜렷한 직업이 없었고 이제는 나이가 많아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김국장은 이에 대해 “수권자 중 대졸자는 거의 없고, 무학이 태반이다. 자기 이름 석자 쓰는 사람이 절반 정도 될까”라고 말해 그 정도를 알 수 있었다.

   
▲ 광복회 충북지부 회원들
 이들 대부분은 독립운동 하느라 집안을 돌보지 못해 가난하게 산 데다 일본인들에게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했다. 더욱이 투옥되거나 목숨을 잃는 일까지 당했다. 이런 불행의 역사는 자손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역시 가난을 대물림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돈이 없어 학교 마당도 밟아볼 수 없었고, 광복이 됐어도 어엿한 직장을 잡을 수 없었던 것. “배운 게 있어야 정부에 대고 따지지”라는 김백호 국장의 말 한마디는 실제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친일파들이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으며 호의호식할 때 이들은 떳떳하고 당당하게 민족편에 서서 험난한 길을 자처했는데 돌아온 것은 가난과 울분밖에 없다.

“박대통령도 조사받아야 한다”

 그 나마 지난 61년 군사원호청(현 국가보훈처)이 생기고 62년 청주보훈지청이 설립돼 독립유공자들은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고 있다. 7등급으로 나뉘어진 훈격에 따라 연금이 정해지나 본인이면서 3등급 이상일 때는 290만원 이상이 되지만 그 외는 100~200만원 정도 된다는 것. 그리고 가장 낮은 대통령표창은 약 52만원 선이며 유족일 경우는 최고가 130만원, 최저가 27만원이라는 게 청주보훈지청 관계자의 말이다.

 그는 “물가변동에 따라 연금이 연차적으로 인상된다. 전에는 형편없었으나 88년 이후에 인상됐고 95년 이후에는 눈에 띄게 올랐다. 광복회원들에게는 자녀 교육도 무료로 시켜주고 대부받을 때 최저 금리 3%를 적용해준다. 무료교육은 지난 2000년부터 손자뿐 아니라 외손까지 확대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광복회원들이 바라는 연금수준은 최저생계비다. 핵가족시대라 노인들끼리만 사는데다 직업이 없어 연금이 수입의 전부가 되다보니 최소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부의 무료교육도 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이미 나이가 넘어 해당자가 별로 없기 때문. 이들은 오히려 서울시가 시행하고 있는 의료비 전액무료같은 실질적인 것이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또 94년 국가유공자법에서 분리된 독립유공자법이 손질돼야 한다는 점도 지적했다.

 광복회원들의 친일파 청산에 대한 의지는 매우 강하다. 김백호 국장의 말이다. “이제 친일파들이 큰소리 치고 살던 시대는 지났다. 나는 오마이뉴스가 친일인명사전 기금 마련할 때 보인 네티즌들의 성원에 감격해 회원들과 함께 돈도 보냈다. 한나라당이 특별법 제정을 반대하는 이유는 그들 자신이 친일파 후손이기 때문 아닌가. 박정희 대통령도 조사받아야 한다. 용서는 국민들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고, 일단 조사는 받아야 한다.” 이들은 친일인명사전이 세상의 빛을 보고 친일파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만들어지면 뭔가 달리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역사앞에 떳떳한 대대수 국민들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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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인 2004-08-30 07:35:44
Name
방관자


Subject
김구선생과 비밀요원 박정희 - 동아일보 자유토론자에서 퍼옴


★필독★ 김구선생과 비밀요원 박정희

유시호 2004.08.26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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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군관학교에 입학 하려던 박정희대통령은 김정균을 통해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났습니다. 김정균은 상해임정에서 비밀첩보원을 하던 김구 선생님의 수족과도 같은 분이었습니다. 남의사 소속의 왕정국, 산서성 총사령관 염석산과 더불어 독립 운동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 김정균의 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 김구 선생은 1939년 3월 어느날 청년 박정희를 만났다. 그때 박정희는 20대 초반으로 아주 적극적인 사고를 지닌 청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때 처음 박정희 청년을 김구 선생에게 소개해준 사람이 김정균의 친한 친구인 신영학 이라는 친구다.

신영학을 통해 소개받은 김정균은 박정희 청년의 뚜렷한 역사 의식과 조국 광복의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것을 보고는 김구 선생에게 소개를 하였다. 그때 박정희를 처음본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1시간동안 부동자세로 세워 두었다. 김구 선생이 본 박정희는 키는 크지 않았지만 부럽뜬 두 눈을 보고는 멈칫 놀랐다고 박정희가 나간후에 김정균이한테 말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 청년은 1시간 부동자세로 서 있었지만 자세하나 흐트러 지지 않았다. 김구 선생이 박정희 청년을 세워두고 외출을 하여 40여분만에 돌아 왔으나 박정희는 그때까지 부동 자세로 서 있었다. 그때 김구 선생은 박정희가 서 있는 자리에 비밀 표시를 해 두었다. 그랬는데 박정희는 그자리에서 1cm도 움직이지 않고 1시간을 서 있었다.
그기에 감탄한 김구 선생은 박정희 청년이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후에 그곳에 모인 광복군 동지들께 말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예의 주시 하고 있었다.
아마 1945년에 광복이 못되고 했더라면 박정희는 김구 선생을 도와 일을 했을것이다 라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이 박정희를 만주 군관 학교를 보낼려고 하였으나 박정희 청년이 적을 알아야 한다며 굳이 일본군 사관학교에 입학을 하였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가 일본군 사관학교에 다니면서도 일본군의 무기정보 일본군의 전술공부등 많은 정보를 김정균이에게 알려 주었다.

박정희 소좌가 일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선양으로 떠날때도 김정균이한테 알려 주었다. 김구 선생은 박정희 소좌가 선양으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김정균이와 박정희 소좌는 수시로 연락을 하면서 일본군의 동태 작전능력 병력이동 계획 일본군의 동태를 알려 주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 이를 뒷받침 할 근거로서는 백범일지에서 나와 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 아. 그리운 조국 산하』에서 발췌 하였습니다.

한국 광복군 창설

1937 년 7 월 노구교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은 항전을 개시 하였다. 이에 재류 한인의 민심도 매우 불안하게 되어서 5당통일로 되었던 민족 혁명당이 쭉쭉이 분열되고 조선 혁명당이 새로 생기고,미주 대한독립단이 쇠퇴하고 근본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 혁명당의 이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원인은 의열단 분자가 민족 운동의 가면을 쓰고, 속으로 공산주의를 실행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민족 혁명당이 분열되는 반면에 민족주의자 결합이 생기니 곧 한국 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 독립당 및 미주와 해외에 있는 모든 애국 단체들이 연결하여 임시정부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 하 중략

이에 임시 정부에서는 이청천을 광복군 총사령으로 임명하고 있는 힘을 다해 중경 가능빈관에 중국인 서양인 중요 인사를 초청해서 한국 광복군 설립식을 거행 하였다, 그리고 우선 30여명 간부를 서안으로 보내어 미리 가있던 조성환등과 합하여 한국 광복군 사령부를 서안에 두고 제 1 지대를 산서 방면으로 보내고 고운기(가명) 제 2 지대장을 수원 방면으로 보내고 김 학규 3 지대장을 하여 산동으로 보내고 나월환등의 한국 청년 전지 공작대를 광복군으로 개편하여 5 지대를 삼았다.

그리고 강서성 상요에 황해도 해주 사람으로서 죽안군 제 3전구사령부 정치부에 일보고 있던 김 문호를 한국 광복군 정모처 제 3분처 주임을 삼고 그 밑에 신정숙을 회계조장 이지일을 정보조장 한도명을 훈련 조장으로 가각 임명하여 상요로 파견하였다.

독립당과 광복군 상해 임정의 일체 비용은 미주,멕시코,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이 보내는 돈으로 썼다. 장개석 부인 송미령이 대표하는 부녀위로 총회에서 10 만원의 기부가 있었다.

『 1944 년』
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나 인원도 많이 못하여 얼마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다가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 여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이 학병으로 일본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 3 지대를 찾어온것을 지대장 김 학규 장군이 보낸 것이었다. - 중략-

이것이 인연으로 우리 광복군이 연합국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미국의 OSS 를 주관하는 서젠트 박사는 광복군 제 1 지대장과 합작하여 서안에서 윔츠 중위는 제 3 지대장 김 학규와 합작하여 부양에서 우리 광복군에서 비밀 훈련을 실시 하였다... - 이하 중략 -


★ 이상에서 보듯이 일본군대에서 탈출하여 온 때는 바로 1944 년도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으며 김정균의 일지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기청(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왈,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 면목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습니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습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합니다.

동아일보에 공개된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임정 당시 가명 안훈·安勳의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 증빙 문건 등은 상해임시정부가 우리나라 민주헌정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최후의 생존자였던 조경한선생이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임시의정원 의원, 광복군 주계장(정훈장교)등 임시정부핵심요인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서의 구체적인 지위와 활동상을 확인해주는 증거입니다.

광복회 자료에 따르면 이때 탈출한 학병과 일본군 조선인들 중에서 탈출 학병 12 명과 징병학병 탈출 160 명을 광복군 제 1 지대 3 구대에 편성 배치하였고, 제 3 지대에도 50 여명의 탈출 학병들을 충칭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공교롭게도 박정희 대통령이 제8 여단에 근무하고 있던 시기와 매우 일치합니다)

본토(대한제국) 에서는 마침 1944년 조선인 학도의용군 지원제도와 징병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수많은 조선인 청년 4385명이 남양과 중국 전선에 배치 되었고 그 중 일부가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 박 정희 대통령이 1944 년 4 월에 소위로 임관되었던 때와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부분을 중시하여야 함)

그동안 박 정희 대통령이 만주군 시절에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다 아니다라는 주장이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었으나 이것은 만주군 복무 시절은 불과 17 개월 정도에 불과한 점에서 보면 그럴수 밖에 없습니다.


★ 현 광복회장 김우전씨가 바로 44 년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에서 투쟁한 사람이며 45 년도에 일본군내 조선인 병사에 고함이란 전단 역시 스스로 일본군 내의 사정을 그만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광복軍 투쟁 전단 첫 공개 "일본군내 韓人은 때를 기다려라"

그 전단은 “아직 전민족적으로 총궐기할 때는 아니다. 때를 기다려라. 제군들은 일군 내에서 작전을 방해하고 손상시키는 게 임무다. 자신이나 동포에게 위험이 없는 범위에서 활동하라. 겉으로는 친일(활동)을 하라”고 적고 있습니다.

일본군 내 조선인 병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이 전단은 김우전(金祐銓·82) 광복회장이 광복군 연락장교 자격으로 중국 남부 쿤밍(昆明) 주둔 미국의 전략첩보국(OSS)에 파견근무할 때인 1945년 4월28일 작성한 것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에 보관돼 있던 이 전단을 지난 3월 확보했으나 작성자를 알 수 없어 광복회에 조회를 의뢰, 김 회장이 직접 선전문을 쓴 사실이 뒤늦게 확인된 것입니다.


★ 백범 김구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이승만 정부와 장면 정권을 거치면서도 그 누구 하나도 광복군과 백범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독립 유공자들을 보살피지 아니 하였습니다.

오직 박정희 대통령께서.. 5.16 혁명을 성공시킨 후 1962 년 김구 선생님을 비롯하여 광복군과 독립군들에게 건국 공로 훈포장을 수여 하시었습니다. 이것이 제일 먼저 박 정희 대통령이 시행한 조치였던 것입니다.

백강 조경한 선생외에 상해임정 요인들과 그때 당시 광복군 대부분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서 5.16 혁명 직후에 건국공로 훈장이 수여되고 광복회가 출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남아있는 항일 기념비와 탑 그리고 동상들은 대부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기록물 역시 그나마 잘 보존되고 있는것은 모두 박정희 대통령의 철학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스스로 백강 조경한(안훈) 선생을 찾어가서 다까끼 마사오라고 밝힌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요? 만약 박 정희 대통령이 부끄러운 짓을 하였다면 당당히 임정요인들을 찾어가서 다까키 마사오라고 밝히며 큰 절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만큼 광복군과 상해 임정을 계승하고 광복군 정신을 살리겠다는 뜻을 전함이 아니었겠습니까?

백범 김구 선생이 주동한 동학농민의 난 역시도 박정희 대통령께서 처음으로 혁명이었다고 정의하시었습니다. 무엇을 말함이겠습니까 ?

민족과 자주를 부르짖는 저들이 지끔까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일본군 위안부들이 울고 있습니다. 탈북동포들이 통곡하고있습니다.

우리민족은 독립투사들을 포함하여 일제시대, 해방시대, 6.25전쟁, 유신시절, 민주화시절을 거쳐 지금까지도 <<국가와 민족의 존립>>을 지키기 위해 <좌파>세력과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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