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맞바꾼 지위로 호의호식, 1000~1만원씩 헌납
친일관료?자본가, 전쟁비용 대기 위해 국방비도 내놓아

 충북의 역사적 인물중에는 친일파로 분류된 인사들이 적잖다. 이들은 단지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친일을 한 것이 아니고 친일문학을 발표하고, 일제에 엄청난 돈을 내기도 하는 등 적극적 친일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생을 친일파 연구에 바친 故 임종국 선생은 이들을 실제 친일파로 분류했다.

 1937년 8월 16일, 충북도청 회의실에서는 관내유지를 중심으로 시국간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일제에 비행기 ‘충북호’를 헌납하자는 결의가 모아졌고 32명의 재력가들로부터 6만500원을 모금했다. 독립기념관에는 이에 관한 자료가 고스란히 보관돼 있다. 충북호 기사가 실린 매일신보와 충북호 명명식 팸플릿 등이 그 것.

   
▲ 매일신보 1937년 8월 18일자 신문

 당시는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해였고 이듬해 일본은 엄청난 전쟁비용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였다. 그래서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모든 자본과 자원을 약탈했다. 친일관료와 자본가들은 국방비와 국방기자재, 헌금 등을 냈고 비행기 헌납도 이런 맥락에서 이뤄졌다. 임종국 선생의 ‘임종국선집’에 따르면 당시 쌀 한가마가 도매가로 17원50전일 때 도내 유지들은 1000원~1만원을 헌납한 것으로 나타났다. 식민지 백성들에게는 엄청난 돈이 아닐 수 없다.

 이 중 청석학원 설립자 김원근이 5000원, 민영택 2000원, 이희준 1500원, 김홍기 민영은 민중식 이명수 최동선 등이 각각 1000원씩 냈으며 충주에서는 권병섭 이춘웅 장석희가 각각 1000원을 낸 것으로 역사는 전하고 있다. 또 영동 손재하가 1000원, 옥천 이정재가 1000원을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매일신보 37년 8월 18일자 신문에는 “민영은씨의 1만원을 필두로 성금이 벌써 6만원여원이 됐다”는 기사가 실려 이 자료와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승우, 김기진, 이무영 적극적 친일파

 독립기념관 소장 자료 ‘군용기헌납운동요강’에 따르면 충북호는 해군 군용기이며 가격이 약 20만원이었다는 것. 이 요강에는 모든 계층이 임의로 내되 연말연시나 일상생활의 비용을 절약하고 근로배가 등에서 얻은 정성이 깃든 재산을 내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즉 일제는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식민지 조선인들을 충분히 활용했고 재력가들은 이들의 요구를 충실히 이행한 것이다. 대신 이들에게는 각종 지위가 주어졌다. 많은 돈을 낸 김원근과 민영은은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 다음가는 중추원 참의라는 고위직에 올랐고 관선 충북도회의원으로 활동했다. 특히 민영은은 도지사 자문기관인 도참사와 도평의원을 지낸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임종국 선생의 저서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펴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참고한 결과 권중현, 이근택, 김기진, 이승우, 정춘수, 이무영, 김용제 등이 적극적 친일파로 분류됐다. 이중 청원출신인 팔봉 김기진은 친일단체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결성준비위원으로 참가한 뒤 일제를 찬양하는 시 ‘신세계의 첫 장’ ‘의기충천’과 시조 ‘대동아전송갗 등을 발표했다. 그런가하면 법조인이었던 이승우는 진천 초평면 출신으로 친일한 덕에 충청북도관찰사, 전라북도관찰사, 궁내부특진관 등을 역임했다. 그는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는데 앞장서는 한편 창씨개명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일로 그는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 구속을 당했다.

 그리고 농민문학가로 알려진 이무영은 40년대 들어 숭일문학의 경향을 보이는 여러 일문소설을 펴냈다. ‘청기와집’ ‘정열의 정서’ ‘초설’ ‘개혁촌을 보고’ ‘촌거단상’ ‘선구자의 변’ 등이 그 것이다. 민예총충북지회는 음성출신의 이무영 행적과 작품에 대해 ‘청주문학’ 2집에서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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