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금
김춘수

1
그는 그리움에 산다.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그리움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져 온다.
떨어져 와서 우리들 손바닥에
눈부신 축제의
비할 바 없이 그윽한
여운을 새긴다.

2
이미 가버린 그 날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날에 머문
이 아쉬운 자리에는
시시각각의 그의 충실만이
익어 간다.
보라,
높고 맑은 곳에서
가을이 그에게
한결같은 애무의
눈짓을 보낸다.

3
놓칠 듯 놓칠 듯 숨 가쁘게
그의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은
세월도 알 수 없는 거기
푸르게만 고인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가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득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 시집 ‘꽃의 소묘’ (1959)

<허장무 글·이은정 그림>

‘그리움은 익어서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빛깔과 향기가 된다.’ 참 멋진 말이네요. 익어가는 능금을 통해 존재의 신비를 발견해가는 경이로운 과정을 진술하고 있는 김춘수 초기시의 특징이 잘 나타나있는 작품입니다. 다분히 숨겨진 의미를 찾아 읽어야하는 시지요.

능금의 실체는 그리움이지요. 그리움은 다시 능금의 빛깔과 향기가 되어 우리의 손에 닿게 되고 우리에게 축제처럼 찬란하고 흐뭇한 충족감을 안겨 준다고 합니다.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오지 않았으나 시시각각 능금은 충실히 익어 끝없이 높고 맑은 곳에서 존재의 참다운 의미가 여운처럼 새겨진다고도 하고요. 그리하여 능금의 진실한 의미인 꽃다운 미소를 따라가면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 즉 생의 넘치는 감격이 존재하는 놀라운 세계를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모름지기 능금의 겉모습이 아닌 실체의 신비한 의미와 가치를 드러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존재의 경이로운 비의, 그것은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가는 능금 같은 영혼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시의 타이틀이며 중심소재인 능금은 시인이 도달하고자 하는 가치의 중심이며 구현하고자 하는 존재의 본질쯤으로 해석한다면, 이 시는 소재의 숨은 의미가 바로 주제가 되는 시이지요. 능금 하나를 가지고 이런 감격을 우리에게 안겨주는 시인의 존재가 새삼 소중합니다.

그러나 이시는 그렇게 너무 주지적으로 해석하지 않아도 되는 시입니다. 그냥 시인이 보여주는 일차적 낱말 그대로 받아들여도 참 좋은 가을시가 됩니다. 시는 모름지기 시인이 건네주는 말보다 독자 스스로 얻어내는 뜻이 더 중요하니까요. 시는 자연의 반영이면서 자연이 미처 담지 못한 아름다운과 진실을 담는 그릇입니다. 결국 자연을 향한, 인생을 향한, 사람을 향한 시인의 뜨거운 열망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 시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그냥 읽어도 시에 빗댄 인생의 얼굴이 능금처럼 곱습니다.

아, 능금 향기에 넋을 잃고 싶어지는 만추의 늦은 햇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