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무게를 떨구고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면서, 문득 선생님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가 생각나 이렇게 편지를 띄웁니다. 1953년, 2차세계대전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파리의 작은 극장에서 초연된 이후, 매년 세계 어느 곳에서든 공연이 열리는 것으로 유명한 선생님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유명세만큼이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그런 연극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연극이 주는 권태로움과 그 쓸쓸함의 정체를 이해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에 의해서였습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선생님의 연극이 캘리포니아 소재 한 교도소에서 공연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 교도관들은 지루하기만한 연극에 수감자들이 소란을 피우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도관들의 걱정과 달리, 1400여명의 수감자들은 극(劇)에 빠져들었고, 극이 끝난후 슬픈 얼굴을 한 채, "고도는 바깥이고 기다림이야"라고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수감자들의 술회를 듣는 순간, 뇌리를 스치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연극은 지식이나 이성이 아닌, 기다림의 절실함으로 이해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기다림이 절실할수록 그 무한반복성이 고통스럽다는 점을, 결국 그 기다림의 순간이 오지 않음을 알면서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무력함에 쓸쓸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들 수형자들의 술회를 통해 느꼈던 것입니다.
베케트 선생님. 그러고 보니 기다림의 무한반복성과 그 쓸쓸함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숙명이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나 우리 사회의 과도기적 성격은 기다림의 무한반복성과 그에 따른 좌절을 던져주고, 결국 우리 모두를 지치고 쓸쓸하게 만들곤 합니다. 벤처창업을 통해 젊은 의욕을 수용하겠다고 했지만, 오늘 우리는 구직을 향한 젊은 청년들의 좌절을 "광복이후 최대의 청년 실업(失業)"이라는 표현을 통해 확인하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권부(權府)의 부패를 보면서 "부패척결"의 그 질긴 정권 반복성에 헛웃음을 지어보기도 합니다. 분단의 철옹성이 깨지고 이산의 아픔이 치유될 줄 알았던 기대가 또 다시 단절과 깊은 한숨으로 바뀌는 것을 보면서, 분단 역사의 비인간적 반복성에 진저리를 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등장할 때에는 자신이 국민적 바램을 해결해 줄 고도(godot)인 양 외쳤지만, 결국은 무능과 독선으로 점철해 온 지금까지의 정치인들과 다름없는 지도자들을 보면서, "좋은 정치인"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확인하기도 합니다.
베케트 선생님. 한 해가 저무는 12월이 왔습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올해도 고도(godot)를 기다렸지만, 그 절실함만큼의 고통과 쓸쓸함만을 남기고 기다림의 순간을 내년으로 넘기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잘 압니다. 결코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년에도 올해와 같을 것임을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고도를 기다리렵니다. 기다림만이 우리의 선택이요, 삶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선생님의 연극 가운데 나오는 "고도가 온다"는 소리를 듣기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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