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 읽기

湖水
이형기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하던 청춘이
어느덧 잎 지는 이 호수 가에서
호수처럼 눈을 뜨고 밤을 새운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처럼 떨던 것이
이렇게 잠잠해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속에 지니는 일이다.
- 시집 ‘적막강산’ (1956)

<허장무 글·이은정 그림>

사랑, 그 성스럽고 치명적인 탐닉. 때로는 가볍기도 하고, 때로는 떠나기 쉬운 것 같으면서도, 그러나 삶을 송두리째 저당 잡는 그 성스럽고 치명적인 탐닉 앞에 우리는 속수무책일 때가 있습니다. 사랑의 열병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고뇌의 밤을 보냈던가. 그 오랜 시련의 터널을 지나 도달한 고요한 성숙의 시간에 이르러 비로소 스스로 다짐하게 됩니다.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사랑에 대해서 금과옥조처럼 세월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 사랑의 아픔을 견디게 해주는 것은 그토록 오랜 기다림을 간직하는 일이라는 사실 앞에, 우리는 비로소 사랑의 진정한 비의에 대하여 냉철하게 한수 터득하게 됩니다.

반 고흐가 말했지요. ‘평생 산다는 것은 걸어서 별까지 가는 것’이라고. 이 말을 조금 바꾸면,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내 사랑이 걸어서 별에 닿을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 되지요. 진실한 사랑은 미래완료의 시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기다림이란 사랑에 대한 해탈 직전에 멈춘 언어지요. 사랑에서 몇 걸음만 나가면 기다림이라는 절대 가치의 완결성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성숙된 기다림은 시간을 초월하여 사랑을 완성합니다. 사랑의 실체는 함께 있음에 연유하는 것이 아니기에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릴 수 있는 근력을 동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새벽이 오지 않는 밤이 어디 있으며, 마르지 않는 눈물이 어디 있으랴. 기다림에서 사랑이 태어나고 사랑은 다시 기다림을 잉태하지요. 우리는 기다림이라는 창문을 통해 사랑을 엿보고, 기다림이라는 길 위에서 사랑을 가로질러 쟁취합니다. 사랑은 찰나처럼 다가오지만, 그렇다고 한꺼번에 다 오지 않습니다. 선가의 수행에 비유하자면 돈오점수(頓悟漸修)인지라 거기에는 마땅히 고통과 인내가 수반되는 것이지요.

사랑은 때로 풀뿌리처럼 체이는 고통이며, 인내는 그리움의 한계지선이 됩니다. 진정한 사랑은 오래 묵히고 많이 참아내는 단련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완성되지요. 오랜 세월 사랑을 지켜주는 것은 사랑을 향한 믿음을 수반한 냉철한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이 시는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속에 지니는 일이다./’ 라고 갈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명징한 사랑의 기다림에 대한 빛나는 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기다림’은 또 무엇입니까. 이 절묘한 감각 묘사 한 구절이 이 시에 끼치는 자장은 대단합니다.

이제 곧 낙엽이 지고 코스모스는 물결 같은 그리움으로 흔들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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