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이들의 가덕-미원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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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이들의 가덕-미원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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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10.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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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면 고령 신씨 독립운동가 포상자 15명 배출, 단재 신채호 사당·묘소 모셔

마지막회 - 한강의 물줄기, 낭성·미원면
권혁상 기자·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청주 낭성면 백석정을 지나면 머그미[墨井] 마을이다. 마을 앞쪽, 커다란 은행나무와 효열각이 보인다. 전형적인 사족 마을의 구성이다. 은행나무는 마을의 역사를, 효열각은 마을의 주인을 말한다. 마을 높은 곳에 이들의 사당이 있다. 묵정서원(墨井書院)이라 부르며, 고령신씨 윗대 여섯 인물들을 제향한다. 대원군 때 여러 곳에 모신 서원이 훼철된 후 1971년 새로 만들었다. 묵정서원 남서쪽으로 앞면 3칸 크기의 사당이 있다. 신숙주의 영정을 모신 묵정영당(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8호)이다. 1888년(고종25) 가덕면 인차리에 있는 영정을 본떠 새로 그려 모시고 있다.

머그미 마을 뒷산은 이곳에 들어온 입향조를 비롯한 선대의 묘역이다. 신형의 아들로 처음 이곳에 들어온 신광윤(申光潤)을 비롯, 3대가 나란히 한 능선씩 차지하고 있다. 신광윤은 1540년경 북이면 석성(石城)에게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전한다. 영당과 서원 사이에 신중엄의 신도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1호)가 있다. 신중엄은 임진왜란 때 군량미를 내어 벼슬을 받기도 하였지만, 실제 두 아들이 문과에 급제하며 영예를 얻었다. 둘째 아들 신식(申湜)은 선조 때 대사헌을 지냈고, 동생 신용(申涌)은 황해도 관찰사를 지내다 그곳에서 죽었다. 아들들이 현달하면서 아버지에게 영광이 미쳐 신도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 신채호 묘소
▲ 단재 신채호사당

단재(丹齋), 자란 곳에 묻히다

신식의 묘는 낭성면 현암리에 있던 것을 최근 옮겨왔다. 그곳을 능골이라 부를 정도로 묘역이 크고 넓었었다. 1728년 반란을 주도한 신천영은 바로 신식의 현손이다. 신식은 훗날 남인으로 나뉘는 여러 인물들과 널리 교유하였다. 실제 혼인으로 연결된 면면은 여주이씨, 전주이씨, 안동권씨 등이다. 무신란의 주동자인 이인좌와 그들이 왕으로 추대한 밀풍군 탄도 혼맥으로 연결된다. 난이 일어나기 전 신식을 중심으로 지역 남인계가 결집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항서원에 배향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좌절된 후 따로 서원을 세웠다. 낭성면 무성리에 있는 쌍천서원이 그것이다. 1695년(숙종21) 미원면 수산리에 세웠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서원은 마을 뒤쪽에 겨우 터를 잡았다. 삼문을 들어서면 사우가 보이고 그 처마 밑에 기다란 편액이 있다. 효자 정표다. 어쩌면 후손의 반란 가담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연유일 지도 모른다. 지금은 감천이라 부르는, 예전 산성과 인경산에서 발원한 물길이 서로 만나 쌍천(雙川)이라 불렀다. 한자 표기가 달라서 그렇지 서원 이름이 여기서 유래한 것은 아닐까.

가덕면 고령신씨 일가의 독립운동은 낭성면에 이어진다. 낭성면 관정리의 영성군파 후손들 중에도 다수의 독립운동가가 있다. 반면 가덕면 일대는 신숙주의 넷째 고천군과 소한공 후손이 다수이고, 신규식·신건식 형제는 소한공의 후예들이다. 고천군의 후손으로는 바로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이 있다. 낭성면 귀래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재 신채호사당 및 묘소(충청북도 기념물 제90호)가 있다. 대전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유년을 보낸 후 사후 이곳에 묘를 마련하였다. 원래 남향으로 묘를 만들었다가 다시 동향하는 뒤쪽 자락으로 이장하였다.

반란에 주동자로 참가한 신천영의 직계는 거의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소위 역적에게 주어진 형벌은 죽음 외에도 이후 자손들이 과거 응시가 불가능하였다. 물론 직계에 해당하지만 방계 또한 불이익을 감수해야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지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가문이니, 아이러니하다. 15인 이상이 독립운동가로 포상을 받았으니 그 가풍은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 일제강점기 이들에게 또 차별과 억압이 끊이지 않았음은 익히 안다. 단재 선생이 그랬고, 임정의 주축을 이루었던 인물들. 독립군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고가를 불태운 왜경들의 횡포. 가덕에서 미원에 이르는 길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이들이 걷던 길이다.

▲ 낭성산성. 남북으로 오가는 요충지에 신라가 쌓은 산성이 있다.

미원 삼거리, 머뭇거린 신라군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보은이나 상주로 향하면 꼭 미원을 거친다. 이 길에서 국도 19번과 만난다. 강원도 홍천 쯤에서 수직으로 내려온 국도가 충주와 괴산을 거쳐 다시 남으로 향한다. 국도의 끝은 경남 남해다. 거꾸로 섬진강을 따라온, 혹은 백두대간을 넘어온 남쪽 사람들이 북으로 향하던 길이다.

그 옛날 삼국이 서로 길을 찾아 나서던 때 이 길은 번잡했다. 처음 백제가 남해안으로 가던 길이었고, 가야 또한 이 길로 백제와 교류했다. 반면 신라가 영토를 넓혀갈 때도 이 길을 놓지 않았다. 익히 알다시피 470년 보은 삼년산성을 쌓은 신라군은 불과 4년만에 문의에 산성을 쌓아 금강에 닿았다. 또 곧바로 북진하여 미원을 거쳐 진천으로 향했다. 미원 3거리는 삼국의 갈림길이다. 북으로, 남으로 향하던 이들이 거쳐간 곳이다.

역시 신라는 교통의 요충에 성을 쌓았으니 미원면 소재지 남쪽의 낭성산성이다. 어떤 이는 여기서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했다고 하고, 청주의 첫 거점이 아니었나 의심하기도 한다. 낭성면의 유래가 이 산성일 수도 있으나, 지금은 미원면에 속한다.

▲ 쌍천서원

문의 양성산성과 낭성까지 다다른 신라군은 지척의 청주를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이때 백제와 신라는 동맹관계를 맺어 고구려군의 남하를 막아내고 있었다. 백제의 입장에서는 신라군을 최대한 전선 가까이 끌어들여 연합군을 이루려 하였다. 신라 입장에서는 싫지 않은 조건이었다. 마침 475년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된 후 피난 수도로 옮긴 곳이 웅진, 공주였다. 문의에서 30여 km에 불과한 반나절 거리다. 어쩌면 온전한 신라군이 의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꽤나 오랜 동안 백제는 신라군에 이끌려 전선을 전전했는지도 모른다. 거점을 차지한 신라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던 궁색한 백제의 현실이었다. 그래서 신라군이 근 70~80년 가까이 목전의 청주를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차지하지 않은 이유인가 보다.

고속도로가 놓이고, 고속철도가 전국을 연결하면서 이제 옛길은 불편함으로 기억된다. 미원의 3거리는 삼국시대의 큰 길이었고, 왕건이 이 길에서 후백제를 막고 신라와 통했다. 또 이후 중앙과 지역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였다. 자연 임진왜란 때 왜군도 이 길로 갔다. 특히 백두대간의 준령을 쉽게 넘을 수 있는 곳이었다. 자연 이곳은 끊임없는 소통의 공간이었다. 산길이 트인 곳을 물길이 지나듯 자연에 의지해 살던 사람들의 수많은 자취를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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