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산성은 한강 발원지의 하나, 추정재부터 한강 수계 남북 잇는 옛길의 자취

(19)한강의 물줄기, 낭성·미원면
권혁상 기자·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 영조대왕태실유적

청주는 누구나 알고 있듯 금강 수계지만, 2개 면(面)은 한강 수계에 속한다. 낭성면과 미원면은 금강이 아닌 한강 물이 흐른다. 옛 낭성면 산성리, 상당산성에서 발원한 물이 미원을 거쳐 미원면 운교리에서 달천에 합류한다. 속리산에서 시작한 한강의 물줄기는 법주사 앞을 지나 보은 산외면과 내북면을 지나 이곳에 이른다. 물길을 이으면 한남금북정맥 산줄기의 뜻을 알겠다. 옛 사람들이 물길을 줄기 삼아 터전을 일구고 서로 교유했던 인문학적 공간이기도 하다.

어떤 이는 상당의 당(黨)을 무리의 뜻으로 읽어, 무리는 곧 물이라 하였다. 곧 상당은 윗물인 셈이다. 한강의 물길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는 뜻도 된다. 상당산성에서 물길을 따라가면 낭성에 닿는다. 옛길이다. 지금은 국도 25번을 따라가다 남일면 두산리에서 나뉜 지방도 32번을 많이 이용한다. 옛 사람들은 이 길을 따라 남으로 향했을 것이다. 자연스레 많은 자취들이 남아있다. 이 길에서 흘러가는 방향만큼이나 다른 생각을 가졌던 이들과 만날 수 있다.

가덕면을 지나 낭성면 경계에 이르면 낮은 고개가 있다. 해발 260m의 추정재다. 옛 기록 속 무심천의 발원지로 이야기한 적현(赤峴)인 듯하다. 여기부터는 한강 수계다. 물길은 말과 풍속을 달리 한다지만 그다지 차이를 찾을 수 없다. 같은 행정단위로 묶인 결과일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길을 따라 지향하는 바가 다를 수 있었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은 <택리지(擇里志)>에서 낭성면과 미원면을 이렇게 적었다.

“동쪽으로 거대령을 넘으면 상당산성이 있고, 그 동쪽에는 청천창(靑川倉)이 있다. 창 서쪽은 신씨(申氏) 마을이고, 남쪽으로 작은 고개를 넘으면 인풍정(引風亭), 옥류대(玉流臺)가 있는데 변씨(卞氏)들이 사는 곳이다. 큰 산 사이에 시내와 바위가 자못 그윽한 경치를 이룬다. 또 동쪽으로 커다란 골짜기를 건너면 귀만(歸灣)인데, 골짜기와 산이 아주 아름답다. 상당과 청천을 아울러 산동(山東)이라 하는데, 지대가 산 위에 있으므로 바람이 차가워 청주 들판보다는 못하다.” (팔도총론, 충청도)

▲ 추정재

한강의 물줄기에서 찾은 보물

지금도 이곳에 세거하는 고령신씨를 달리 산동신씨라고 하니, 그 말의 연원을 알겠다. 동쪽의 청천창은 지금의 청천면 소재지를 말한다. 1757년(영조33) 송시열의 묘를 옮겨오기 전까지 이곳은 청주목에 속한 창고가 있었을 뿐이다. 청천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미원면 금관리다. 고갯마루에 ‘옥화9경’을 알리는 표지가 있다.

고개를 내려서면 굽이돌아 흘러온 한강을 만난다. 이곳에 펼쳐진 절경을 9경(景), 9곡(曲)으로 꼽는다. 9경은 청석굴, 용소, 천경대, 옥화대, 금봉, 금관숲, 가마소뿔, 신선봉, 박대소. 9곡은 만경대, 후운정, 어암, 호산, 옥화대, 천경대. 오담, 인풍정, 봉황대다. 상류에서 아래로 9경을, 하류에서 오르며 9곡이란다. 만경대가 청천에 속해서인지 9곡보다는 9경을 앞세운다. 아무튼 옥화대와 천경대가 겹치는데, 연이어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택리지>에서 말한 옥류대는 옥화대일테고, 인풍정은 9곡에만 속한다. 8곡 인풍정(引風亭)은 마을 이름으로 남아있다.

▲ 옥화대에 있는 옥화서원

인풍정과 옥화대 인근에 변씨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는데, 그 사이 변화가 있었나 보다. 지금은 함양박씨와 파평윤씨가 세거한다. 그들의 자취는 옥화9경을 따라 적지 않다. 옥화대에서 자주 언급되는 이는 이득윤(李得胤, 1553~1630)이다. 본관은 경주, 호를 서계(西溪)라 하였으니, 우리에겐 서계 선생이 익숙하다. 아버지 이잠(李潛)은 은둔하며 제자를 길러낸 인물이다. 이시발의 아버지, 이대건도 그에게 배운 것이 인연이 되어 청주에 정착하였다. 또 이득윤은 이시발을 가르쳤다. 이득윤은 1588년(선조21) 진사시에 오른 후, 1624년 괴산군수를 지냈다. 첫 부인이 파평윤씨이고, 딸이 변시망(卞時望)에게 시집갔으니, 터전과 가까운 사람들이다. 일찍이 서기(徐起, 1523~1591)와 박지화(朴枝華, 1513~1592)에게 배워 역학과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스승이 선가(仙家)의 일가를 이루었으니 그 맥을 이은 셈이다. 서기와 박지화는 이지함, 정렴 등과 함께 호서지역 학문의 뿌리가 되었으니, 그들에게 배운 이득윤의 위상을 엿볼 만하다. 청주 신항서원과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배향되었다. 미원면 가양리는 경주이씨들의 세거지로, 수락영당과 여러 인물에 대해 살펴본 바 있다. 이곳 가양리 안쪽 길을 따라 산에 오르면 바로 이득윤의 묘가 있다.

▲ 박지화와 이득윤을 제향하는 구계서원. 청안에 처음 세웠으나 훼철된 후 분평동으로 옮겨온 것이다.

참으로 묘한 인연, 영조와 고령신씨

산성을 나온 물길은 갈산리와 무성리를 지난다. 무성리 태봉말 뒷산에 영조대왕 태실유적(충청북도 기념물 제69호)이 있다. 마을 북쪽 능선을 오르면 태실과 태실비가 나온다. 우리에게 고향은 ‘태(胎)를 묻은 곳’이라 한다. 곧 태어난 곳을 이른다. 그런데 옛 왕자나 공주(옹주)가 태어나면 전국의 명산을 찾아 태를 묻었다. 그들에게 태를 묻은 곳은 직접적인 인연은 없으나, 왕위에 오르면 새로 단장을 하는 등 그 의미가 작지 않았다.

영조가 태어난 1695년(숙종21) 이곳에 태실을 마련하였다. 영조가 왕위에 오른 후 1729년(영조5) 태실을 새로 만들었다. 계란 모양의 태실을 꾸미고 바깥쪽에는 돌 난간을 둘렀다. 그리고 태실 앞에는 태실비를 세웠는데, 앞면에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 하였다. 태실 수리보고서인 영조태실석난간조배의궤(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0호)가 전한다. 태실 조성 경위와 동원한 인력과 물자를 기록하여, 사회·경제사적 의미가 크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태실을 크게 훼손하였다. 태항아리만 꺼내 창경궁으로 옮겼다. 그 후 그 자리에 민묘가 들어서고 1981년 새로 복원하였다.

▲ 이득윤 묘

그런데 자신의 태를 묻은 이곳에서 왕위에 오른 지 불과 4년만에 반란이 일어났다. 1728년 무신란(戊申亂). 우리 지역에선 신천영(申天永)의 난이라고도 한다. 신천영은 곧 고령신씨로, 낭성면 일원에 살고 있었다. 영조도 태를 묻은 곳에서 자신을 부정하는 반란이 일어났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을 것이다. 하여튼 난이 진압된 뒤 고령신씨 일가에 불어 닥친 피바람은 예견된 것이다.

낭성면 관정리에 자리를 튼 고령신씨는 영성군파로 나뉜다. 신숙주의 일곱 째 아들인 신형(申泂)의 후예를 말한다. 흐르는 물이 너른 들을 만나기 직전, 산 아래 작은 정자가 있다. 호서 지역의 여느 정자처럼 산에 의지해 들판을 바라보고 있다. 옛 사람들은 청주에 들어서기 전 이곳에 들러 풍광을 읊었으리라. 이 정자의 이름은 백석정(白石亭)으로, 1676년(숙종2) 신교(申攪)가 세웠다. 이곳에서 영남 선비들을 맞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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