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 읽기


김영랑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엇모리 자진모리 휘몰아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맞아서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어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때리면 만갑(萬甲)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長短)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演唱)을 살리는 반주(伴奏) 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컨덕터요.

떠받는 명고(名鼓)인데 잔가락을 온통 잊으오.
떡 궁! 동중정(動中靜)이오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이 가을 같이 익어가오.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치지.

- ‘영랑시집’ (1935)

<허장무 글·이은정 그림>

중요 무형문화재 5호인 판소리는 우리의 소중한 전통 문화유산이지요. 이 시는 광대의 창과 고수의 북이 잘 어우러질 때 비로소 판소리의 예술적 가치가 발휘되듯이, 사람의 삶 또한 판소리가락처럼 균형 잡힌 조화와 상생 속에서만 ‘인생이 가을 같이 익어’갈 수 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판소리의 창이 4음보이듯 이 시도 전통 가락인 3, 4음보를 바탕으로 했고, 진양조에서 휘모리까지 장단을 따라 시행이 점점 길어지다가 다시 짧게 마무리 하고 있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느린 가락과 빠른 가락이 절묘하게 만나야 숨결이 꼭 들어맞는 것처럼 인생도 어려운 일 시원한일이 균형 있게 어우러져야 흔치않은 의미를 얻을 수 있는 것이지요.

‘일 고수 이 명창’이라는 말이 있는데, 북은 오히려 창을 이끌어가는 주체입니다. 명창 송만갑도 북의 추임새 없이는 그의 절창에 이르지 못하지요.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잡지’ 고수의 추임을 받아 소리가 오르고, 절정에 오른 소리를 따라 북채는 신명을 더합니다. 소리꾼과 고수가 서로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데서 그 존재와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이 오묘한 조화와 합일이야말로 너와 나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가꿔가는 명확한 이치일 것입니다. 가락에 취하면 그까짓 소소한 인생사는 잡스러워 접어두게 되는 것. 너와 내가 소리를 밀고 나가는 힘은 분명 머리가 아니라 가슴일터. 너와 나의 심연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영혼의 울림이 곧 좋은 소리, 좋은 인생을 떠받드는 근원인 것이지요.

오직 나는 천상의 소리꾼을 위해 북을 치고, 너는 오로지 명기의 신명을 위해 피를 토해 소리하지요. 이렇게 이승을 몽땅 끌고 가는 유일하고 전능한 합일의 실체가 바로 인생의 예술적 승화가 아닐까요. 모름지기 조화와 합일과 상생을 으뜸의 가치로 여겨지는 예술이나 인생은 분명히 고상한 관계의 미를 창조하는 우아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술이 생활을 모방하고 생활이 예술을 모방할 때 그 사회는 한층 고양된 품위를 발휘합니다. 행복은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 발견의 대상이지요. 고귀하고 행복한 인간을 가장 많이 길러내는 나라가 가장 부유한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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