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는 어떤 대의(大義)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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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는 어떤 대의(大義)로 사는가
  • 권혁상 기자
  • 승인 2015.09.23 15: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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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의 천재 남일면 ‘한원노’묘역, 가덕면 고령신씨 ‘독립로’ 명명

(18)남일면·가덕면 : 독립운동가 집중 배출
권혁상 기자·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 폭서암.

사철 흐르는 무심천은 대청댐의 물을 끌어온 결과다. 장암동에 가면 그 물길을 찾을 수 있다. 거기서 좀더 오르면 장군암, 폭서암(曝書岩)이 나온다. 장군암은 무속에서 붙인 이름이고 폭서암은 책을 말리던 바위라는 뜻이다. 이 바위에 커다랗게 글자가 새겨있다. ‘漢原盧先生 曝書岩’(한원노선생 폭서암). 문인 황득효(黃得孝)가 써서 1808년(순조8)에 새긴 글이다.

한원노선생은 누구인가.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이 천재라 극찬했던 노긍(盧兢, 1738~1790)이다. 노긍의 본관은 교하, 한원은 그의 자이다. 아버지는 진사 노명흠(盧命欽)이고 어머니는 광주이씨다. 1765년(영조41) 진사에 입격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못했다. 그의 집안이 남인에 속하면서 벼슬 길이 제한됐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문과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하자 다른 길을 택했다. 바로 ‘대리시험’, 거벽(巨擘)이다. 그러나 일이 발각되어 1777년(정조1) 정월 유배에 처해졌으나, 그해 11월 석방되었다. 그런데 그가 석방되자, 여러 신하들이 반발하였다. 그가 단지 글 파는 짓뿐만 아니라 ‘역적의 집에 드나들며 그들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당쟁 속 천재의 암울한 현실이었다.

연꽃으로 널리 알려진 장암방죽을 지나 마을 뒤쪽에 그의 묘가 있다. 같은 남인이었던 이가환은 그를 이렇게 평했다. “그가 태어나 우리나라는 한 사람을 얻었고, 그가 죽자 우린 한 사람을 잃었다.” 인물에 대한 이와 같은 극찬이 더 있을까.

▲ 한란 묘.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산송(山訟)

장암동을 지나 고개를 넘으면 남일면 신송리다. 마을 입구부터 교하노씨 세거지란 표석이 시선을 끈다. 마을 입구에서 남쪽 좁은 길로 들어서면 끝 무렵에 체화서원이 있다. 원래는 그저 체화당사였으나 후손들이 크게 확장하였다. 체화당사는 선조 때 노계원(盧繼元, 1532~1586) 등 4형제의 효행을 기려 유성룡의 천거로 세운 것이다. 왕이 직접 ‘체화당’이라 어필을 내렸다고 한다. 체화당사와 그 내력을 적은 사적비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공군사관학교 비행장이 있는 가산리의 뒷길이다. 고갯마루를 넘어서면 제법 큰 마을이 나타나고 한쪽 기슭에 커다란 무덤이 있다. 청주한씨의 시조 한란(韓蘭)의 묘소이다. 그런데 이곳 마을에 처음 들어온 이들은 인동장씨였다. 큰길 쪽 입구에 인동장씨 관련 유적이 많다. 교하노씨 노유근(盧有謹)의 부인은 인동장씨인데, 그가 처가로 들어오면서 두 성씨가 어울려 살았다. 이곳 가산리에 또 하나의 성씨가 임진왜란 때 들어오는데, 바로 동래정씨다. 실제 지금의 가산리는 동래정씨가 다수를 이루고, 교하노씨는 신송리에 세거한다.

이렇듯 세 성씨의 동거는 혈연으로 얽혀 너른 구릉과 들에 각기 세거의 둥지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들어서 청주한씨들은 자신들의 시조 찾기에 나서면서 분란이 싹텄다. 시조제단비(1605)와 무농정(1688)을 세우며 막연히 시조 전승을 이해하고 있던 한씨들이 시조 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과정을 한란 신도비(1768)에 자세히 적었다.

“중간에 실전하여 타인들이 함부로 차지하여 묘를 찾을 수 없었다. …1689년(숙종15) 참판 한성우 등이 관에 제소하였다. 조정에서 관리를 보내 흙을 파내고 살펴보니 물증이 있어 범인은 사실을 자백하였다.”

한란 사후 750여년이 지난 1689년, 비로소 다른 이들이 함부로 점유하던 묘를 찾은 것이다. 타인은 바로 교하노씨를 말한다. 이때 청주한씨가 거족적인 차원에서 시조 묘 찾기에 돌입한 결과였다. 시조제단비 건립부터 중앙의 유력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1689년 이전 이미 50년 가까이 다툼이 있어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되면서 마무리된 것이다. 그런데 그해 9월 이 문제는 조정에서 다시 논란이 되었다.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는 청주한씨와 외가로 먼 친척이었으며, 무엇보다 같은 노론계였던 것이다. 이를 남인계 인사들이 문제 삼은 것이다. 하지만 당시 노론의 집권 하에서 더 이상 진전되지는 않았다.

한란 묘가 다시 기록에 보이는 것은 1906년이다. 한란 묘 가까이에 인동장씨 입향조 묘가 있는 것을 한씨 쪽에서 문제 삼은 것이다. 이때는 조정에서 인동장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지금도 한란 묘 서쪽에 인동장씨 장덕생(張德生)의 묘가 내려다보고 있다.

사실 전통시대 산림에 대한 소유권은 희박하였다. 그러던 것이 이와 같이 조선 후기에 집중된 산소 분쟁인 산송(山訟)을 통해 점차 소유 관계가 확대되었다. 곧 자신의 선조 묘를 찾음으로써 소유권을 인정받기에 이른 것이다. 조선 후기 내내 끊임없이 제기된 산송은 바로 땅 차지의 명분이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쓴 가덕면 신홍식의 묘비.

독립로라 이름 붙일 그 길

역사에서 배웠던 당쟁이 지역에서 구현된 것은 산송이다. 역시 중앙 세력의 힘을 입은 노론계의 우세로 매듭 된다. 교하노씨와 함께 청주 남쪽 지역의 대표적인 성씨는 고령신씨이다. 같은 훈구파의 후예라 하더라도 다른 길을 간 경우이다. 지금 상당구 가덕면, 낭성면, 미원면 일원엔 다수의 고령신씨가 세거한다. 이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제’ 자체다. 국권을 빼앗긴 후 15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것도 빼어나다.

가덕면 사무소와 마주 보는, 북쪽을 향해 신홍식(申洪植, 1872~1937)의 묘소가 있다. 3·1만세운동 33인의 한 사람이다. 35세 세례를 받은 후 1913년 서울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뒤 공주와 평양 등에서 목회활동에 나섰다. 1919년 태화관에서 체포된 후 2년 6개월 동안 복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그런데 가덕면 묘비의 앞면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쓰고, 비는 육인수가 세웠다. 만주군 장교 출신의 대통령이 한글로 비문을 직접 쓴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신규식·신건식 형제의 생가.

중추원 의관을 지낸 신용우는 모두 네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신정식(申廷植)을 제외하고 모두 중국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동생 신규식·신건식 형제는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서 출생하였다. 이곳은 고령신씨의 집성촌으로 그는 소안공의 16대손이다.

가덕면 인차리에는 이들 일가의 자취가 남아있다. 인차2길 마을 안쪽에 신규식·신건식 형제의 생가가 있다. 좀더 들어서면 신규식 부부의 묘소가 있다. 원래 신규식의 부인 한양조씨의 묘소였다. 그 후 신규식의 유해를 옮겨오면서 한때 합장하였다가 다시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신건식의 외동딸이자, 신규식의 조카인 신순호(申順浩, 1922~2009)는 아버지와 함께 부녀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가덕중학교 또한 이들 일가의 자취가 있다. 학교 운동장 한켠에는 신홍식의 동상이 있다. 그리고 교사 뒤쪽엔 삼강(三岡)도서관이 있는데, 신순호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 도서관 건립 비용을 희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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