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 읽기

달·포도·잎사귀
장만영

순이, 벌레 우는 고풍(古風)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 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밤.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 포도 넝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구나.

- ‘시 건설’ 창간호 (1936)

허장무 글·이은정 그림

달빛의 체온이 밀물처럼 온몸으로 스며드는 듯합니다. 환한 달빛 속에 ‘순이’로 호명되는 소박한 이름 하나,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저만치서 먼저 손 내밀며 보름달처럼 웃고 있네요.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고요. 포도 내음처럼 달의 말랑말랑한 속살의 향기가 곱게 번지는 밤, 푸른 동해의 물같이 쏟아지는 달빛 속에 만상은 고운 빛깔로 서로를 감싸 안고 지상이 따뜻하게 한빛으로 흐릅니다. 내밀한 동양화 한 폭이 자아내는 고요함 뒤에 숨은 은밀한 이미지의 관계망이 한번 출렁, 가을밤을 비경의 경지로 끌어올립니다.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달빛과 과일이 이처럼 환하게 교감하는 순간을 감각의 촉수를 동원한 표현을 통해, 은가루처럼 섬세하고 명징한 빛을 지상에 마구 뿌려댑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뚫고 달빛이 포도송이 위에서 군무를 추지요. 달빛을 머금은 포도송이마다 음표처럼 튀어 오르는 눈부신 발레복의 율동이 시선을 찌릅니다.

이 작품은 장만영의 시 세계를 대표하는 것으로, 다른 모더니즘 시들과 달리 도시보다는 농촌을 문명보다는 자연을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장만영 시인은 1975년 작고할 때까지 출판사도 운영하고, 서울신문사 출판국장으로 ‘신천지’라는 잡지도 간행하면서 주로 모더니즘의 영향아래 시를 썼지요. 그는 다섯 권의 시집을 남겼고 말년에는 별로 시작활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포도송이마다 달빛이 향기처럼 익어가는 가을밤, 만월이 한껏 부푼 볼우물로 둥근 발자국 찍으며 앞서 걷다보면 어느새 추석입니다. 서정을 가득 담은 저 달이 곧 한가위에 닿아 우리의 아름다운 풍속을 환하게 비출 것입니다. 늘 소박하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당신, 풍성한 한가위 보내면서, 부디 많은 이웃들과 기쁨과 상찬 두루 나누시길.

‘달하 노피곰 도다샤 머리곰 비취오시라’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