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가로 입향한 중화 양씨 양우의 네모꼴 묘역 주목
백록서원 안동권씨, 봉계서원 고령신씨 남인계 문중

(17)오송읍·옥산면 : 옛 길과 첨단의 만남
권혁상 기자·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밀양박씨의 한 갈래가 수의동 도장골에 있는데, 박미의 둘째 아들 박광영(朴光榮)의 후예들이다. 특히 그의 손자 박숭원(朴崇元)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신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올랐다. 그의 공신교서가 전하며, 강내면 월탄리에 사당이 따로 있다. 이곳 수의동 동쪽 산자락에서 어떻게 이들이 자리 잡았는가는 그들의 묘역에서 알 수 있다.

▲ 박숭원의 사당인 충정사. 강내면 월탄리에 있다.

먼저 박광영의 부인은 중화양씨(中和楊氏)로, 양석견(楊石堅)의 딸이다. 수의동 밀양박씨의 묘역 가장 높은 곳에 양석견의 묘가 있고 중간 즈음 중화양씨의 묘가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박숭원과 그 후손들의 묘가 있다. 다른 입향조 묘역 사례에 비추어 이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 수의동은 중화양씨의 묘역이었고, 그 후 밀양박씨들이 자리 잡은 사실을 말한다. 박광영은 강직한 성품으로 자주 유배를 떠났다. 그래서 부인 중화양씨는 친정으로 내려왔다가 죽은 후 이곳에 묻혔다.

이후 밀양박씨들은 할머니의 고향으로 들어오면서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특히 박숭원은 진외할아버지 양석견의 묘 아래에 묻히고, 그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자리 잡았다. 이곳에서 가장 오랜 중화양씨는 양우(楊遇)이다. 그의 묘는 네모꼴로,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양식이다. 그가 묻힌 때를 가늠할 수 있다.

박우현 순절 청주성 탈환 계기

올해도 어김없이 청주성 탈환을 기념하는 축제가 열렸다. 그 주인공으로 조헌과 영규, 박춘무가 등장한다. 그런데 기록에 보면 공주로 향하던 조헌이 청주로 발길을 돌린 연유로 한 인물의 순절을 꼽는다. 박우현(朴友賢, 1572~1592). 조헌의 청주성 탈환을 기념하는 기적비(중앙공원 소재)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조헌)선생은 이때에 옥천(沃川)에 있었는데, 난리의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며 의병을 일으켜 먼저 보은(報恩)에 있는 적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순찰하는 이들이 길이 막힘에, 선생은 오른쪽 길로 돌아 1,600여 명을 이끌고 깃발을 나부끼고 격문(檄文)을 돌리며 적이 나아가는 것을 막았다. 적병들 중 청주(淸州)에 웅거(雄據)하고 있는 자들의 기세가 성하여, 방어하거나 방어를 돕던 여러 군사들이 모두 궤멸하여 의사(義士) 박우현(朴友賢)이 전사하니 선생이 이에 달려가 승(僧) 영규(靈圭)의 군사와 합세하였다”

조헌이 청주성 탈환에 돌입한 것은 다름 아닌 박우현의 순절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우리 지역에서는 그와 같은 사실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아무튼 조헌의 참전 이전 청주 지역 인사들의 의병활동을 주목할 수 있다.

다시 물길을 따라 오르면 환희리에 이른다. 옥산중학교 뒷길로 갈 수도 있는 이곳은 안동권씨들의 터전이다. 그들도 임진왜란 후 청주에 들어왔으나 그보다 앞선 인물을 잊지 않았다. 환희리 마을 가장 높은 곳에 백록서원(白鹿書院)이 있다. 처음 들어온 권필중(權必中) 형제의 할아버지인 권상(權常, 1508~1589)을 모신 곳이다. 권상은 1760년(영조36) 월오동의 봉계서원(鳳溪書院)에 함께 모셔졌다가, 1929년 옛 자리에 다시 모셨다. 권상의 호를 딴 ‘남강사(南岡祠)’라 사당을 세우고 앞쪽에 강당을 세워 오늘에 이른다. 봉계서원은 고령신씨의 문중서원이다. 지역의 남인을 대표하는 문중으로, 안동권씨 역시 마찬가지다. 지역에서 우세를 점하던 노론에 맞서던 남인계의 동향을 엿볼 수 있다.

▲ 백록서원.

병자호란의 순절 충신 2명

옥산을 지나는 북쪽 길은 천안에 거쳐 서울로 향한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많은 의병진이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광주 무계에서 월등한 청군의 무력 앞에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이때 우리 지역의 두 인물도 순절한다. 3대 창의가로 유명한 박동명(朴東命)과 남편을 따라 죽은 부인의 절의로 알려진 강득룡(姜得龍)이다. 이들은 역시 나라에서 정려를 내려 그들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강득룡 부부 충렬각은 현재 공사가 한창인 청주테크노폴리스 바로 옆 화계동에 있다.

의병장 박춘무(朴春茂)의 아들인 박동명은 광주에서 순절한 후 시신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애마가 주인의 혼을 불러 이곳 옥산까지 이르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지금도 옥산에서 천안으로 향하는 고개를 몽단이고개, 접지고개라고 부른다. 꿈이 끊겼다는, 곧 혼을 모셔오다 여기서 멈추었다는 몽단이 전설. 그리고 말굽을 떼지 않고 그대로 굶어 죽었다는 의마의 이야기. 마침 고개 가까이에 주인공 박동명의 묘가 있고, 고개 아래에는 의마총(義馬塚)이 있다. 원래 둥근 모양이던 것을 얼마 전 후손들이 마치 말 모양으로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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