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군에는 아버지는 독립유공자로, 아들은 사회주의자로 굴곡진 가계사의 닮은꼴 두 가문이 있다.

지난 12일 청주예술의전당 대회의실에서는 20회 홍명희문학제가 열렸다.

일제강점기 대하역사소설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1888~1968)는 1919년 3월 19일 충북 최초의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좌우합작전선인 신간회 창립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면서 사회주의자로서 광복 후 북한 내각 부수상을 지냈다.

북한을 선택한 이런 전력으로 독립운동을 했음에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한 홍명희의 이름 석 자는 고향 괴산에서 한동안 언급조차 할 수 없었고 홍명희문학제 역시 20년 동안 고향에서 본행사가 열린 것은 7차례에 불과하다.

홍명희의 아버지는 1910년 8월 29일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에 강분해 최초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순국열사 홍범식(1871~1910) 당시 충남 금산군수다.

홍범식은 유서에서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은 홍범식은 2000년 8월에는 국가보훈처로부터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독립유공자 아버지와 사회주의자 아들의 굴곡진 가계사는 홍범식·홍명희 말고 괴산에 또 있다.

소수면 수2리 숫골 마을에는 김용응(1870~1945)·김태규(1896~1956) 선생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높이 2.7m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이 공적비는 지난해 3월 충주보훈지청에서 이달의 현충시설로 지정했다.

김용응 선생은 병농(炳濃)이란 이름으로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활약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광주형무소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잠릉참봉을 지낸 선생은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광복 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특위위원장에 추천했으나 병환으로 취임하지 못했다.

1927년에는 일제강점기 좌우 합작운동이었던 신간회 괴산지회를 이끌었다.

아들 김태규 선생은 부친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의견서,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독립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중국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국내의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와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해 임시정부에 보냈고 연병호·안재홍 선생 등과 독립사상 고취를 위해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해 재무부장으로 활약했다.

1919년 11월 국내에 들어왔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1년간 옥고를 겪었다.

정부는 1963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두 부자의 독립운동은 김태규 선생의 차남인 김형식(89) 옹의 좌익 전력으로 그늘에 가려지는 아픔을 겪었다.

김 옹은 빨치산 활동을 하다 붙잡혀 20년간 장기수로 옥살이를 한 뒤 고향에 정착했으나 최근 건강이 좋지 않아 고향을 떠나 생활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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