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촌리에 하동정씨 충렬문, 세조의 좌익공신 정수충 사당 세워
밀양박씨 규정공파 세거지, 정난공신 박중손 부조묘 매년 제사

(16)내수읍 : 성군 세종의 향기, 그 길을 걷다
권혁상 기자·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 하동정씨 부사직공파 세천비와 충렬문.

아우내는 흘러 제법 커다란 물길을 이루고 주변 많은 농토에 물을 댄다. 그 물길에 의지하여 일찍부터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옥산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경부고속도로를 넘으면 덕촌리에 이른다. 덕촌은 큰 마을이란 뜻일 게다. 여느 마을처럼 터 잡은 주인을 알리듯 정려가 있다. 하동정씨 충렬문. 충주지씨 열녀각이라고도 한다. 정면을 바라보는 안쪽의 현판은 열부(烈婦) 정검(鄭儉)의 부인 충주지씨, 다른 한쪽에 절의(節義) 하동정씨의 문이란다. 임진왜란 때 순절한 정검과 남편의 뒤를 따라 절의를 지킨 부인의 정려이다. 정려의 주인공 묘소는 옥산중학교 뒤편에 있다.

해발 150m의 산자락을 끼고 마을은 삼태기 모양으로 들어섰다. 안쪽에 들어서면 서쪽을 향한 옛 사당이 보인다. 대개 역사 오랜 마을마다 가문의 현달한 인물을 내세웠으니, 정수충(鄭守忠, 1401~1469)의 사당이다. 그는 세조의 즉위를 도와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올랐다. 정수충의 영정을 보관한 사당으로 그의 시호를 따 문절영당(文節影堂)이라 부른다. 그의 영정과 그린 내력을 적은 글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59호). 정수충의 손자, 정광업(鄭光業)이 이곳으로 옮겨온 후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 박중손 부조묘, 그의 시호를 따서 공효묘라고도 한다.

역사에 묻힌 독립운동가 정순만

한편 하동정씨의 인물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정순만(鄭淳萬, 1876~1911)이란 이가 있다. 흔히 이승만·박용만(朴容萬)과 함께 독립운동의 3만(萬)이라 불린다. 얼마 전까지 단지 충북 청원 출신으로만 알려져 왔다. 일찍이 독립협회 창립에 관여하였고, 고향에 덕신학교를 세워 인재 양성에도 힘썼다. 또한 상동청년회의 주도적인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1906년 만주로 망명하여 이상설 등과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였다. 1907년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고, 1908년 이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민족계몽과 독립운동에 주력하였다. 무엇보다 이듬해 안중근 의거를 주도한 사실이 눈에 띈다. 그러나 1910년 노선갈등을 겪던 양성춘을 권총으로 사살해 구속되면서 그의 꿈은 좌절되고 만다. 옥고를 마치고 재기를 꿈꿔 왔으나 이듬해 6월 양성춘의 일족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독립운동사의 족적이 적지 않음에도 그의 기록이 많지 않은 것은 비극적인 죽음과 관련 있다. 1910년 전후 연해주 한인 사회의 갈등은 그에 대한 평가마저 제대로 남기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자취는 사진 한 장 남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다. 그나마 올 4월 기념사업회를 창립하고, 제대로 된 연구서 한 권이 이제야 비로소 세상에 나오며 이제 첫 걸음을 뗀 셈이다.

옥산과 오송 일대에 널리 터 잡은 성씨가 밀양박씨이다. 먼저 이야기한 정순만의 어머니가 밀양박씨이니 같은 지역에 세거한 두 문중의 자연스런 만남이다. 밀양박씨의 대표적인 인물은 박훈(朴薰, 1484~1540)이다. 먼저 밀양박씨는 신라 건국 시조 박혁거세를 시조로 한다. 밀양박씨는 신라에 이어 고려·조선에 이르기까지 유력 성씨로서 자리하면서 거대 문벌을 이루었다. 우리나라의 밀양박씨는 인구수도 적지 않아 세계와 분파에 대해 여러 갈래로 나뉜다.

▲ 밀양박씨천을 새긴 고인돌. 뒤로 공효묘가 보인다.

청주지역에 세거하는 밀양박씨는 대체로 규정공파(糾正公派)가 다수를 이룬다. 규정공 박현(朴鉉)은 시조로부터 45세, 밀양박씨로 분적한 후 16세에 해당한다. 조선 전기 밀양박씨는 흔히 말하는 훈구파(勳舊派)에 해당한다. 조선 초기에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였고, 박중손(朴仲孫, 1412~1466)은 1453년(단종 1) 계유정란 때 수양대군을 도와 김종서 등을 제거한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오르고, 응천군(凝川君)·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다. 선대의 관력이 계속된 것을 보면 서울 거주 훈척으로 자리하였으며, 사림파로의 전환은 박광영·박훈 때에 비로소 실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박훈 묘소.

옥산과 오송은 밀양박씨의 터전

이런 연유로 청주 지역의 밀양박씨는 박중손을 파조로 여기고 제향 한다. 밀양박씨의 커다란 족적은 덕촌리를 지나 서쪽으로 더 들어서면 만날 수 있다. 옥산 신촌리에 박중손의 부조묘(不?廟)가 있다. 대개 3~4대조 위로는 1년에 한 번 시제를 지내는데 반해, 현달한 인물은 매년 따로 제사를 지낸다. 그런 분을 모신 사당을 부조묘라 한다.

박중손 부조묘 앞쪽에 고인돌이 있다. 흔히 신촌리 고인돌이라 부른다. 이 고인돌에 ‘밀양박씨천(密陽朴氏阡)’이라 하였다. 밀양박씨의 마을이란 뜻이다. 이 고인돌을 표식 삼아 주변은 온통 밀양박씨의 묘역이다. 박중손의 아들 박미(朴楣)는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두 형제의 후손이 청주에 자리 잡았다. 셋째 박증영(朴增榮)과 박훈 부자는 <눌재강수유고>라는 문집을 남겼는데, 그걸 찍었던 판목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전한다(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77호). 부자의 학문적 위상과 문중 내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 박훈 신도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81호).

다시 고인돌을 지나 들어서면 바로 박훈의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1748년(영조24)에 세웠다. 신도비는 묘소 입구에 세우니, 근처에 주인공의 묘가 있을 것이다. 박훈은 중종 때 현량과에 급제하여 기묘사화(1519) 때 화를 당해 무려 15년간 유배에 처해졌다. 중종 말년 풀려나 외가인 오송읍 연제리에서 만년을 보냈다. 오송 연제리를 모가울이라 하여, 밀양박씨 후손들을 모가울 박씨라 한다. 그만큼 그곳에 세거했던 박씨들의 연원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박훈은 신항서원 건립 때부터 배향된 청주의 대표적인 사림이었다. 박훈 묘 아래쪽에는 밀양박씨의 재실인 수천암이 있다. 원래 사찰로 쓰이던 건물을 조선 후기에 고쳐 지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찰이었던 사실은 수천암 서쪽 언덕에 있는 승탑이 그것을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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