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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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향기
  • 육정숙 시민기자
  • 승인 2004.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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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빛이 강렬하게 쏟아지는 칠월의 오후, 시퍼렇게 출렁이는 바다, 얼음같이 차고 맑은 물한 계곡을 그리며 내 정념을 불태우고 있었다. 이렇게 여름은 내 추억 속의 젊음, 사랑, 그리움을 안고 달려온다.

 숨이 막힐 듯 찌는 더위 속에서 비몽사몽인데 느닷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푸른 생명들이 달음질치는 여름으로 향한 꿈이 허공으로 산산이 흩어지고 나는 김빠진 맥주 맛처럼 덤덤하게 수화기를 들었다. 초등학교 남자 동창이다.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꽃이, 무슨 꽃인지 알아 보란다. 덥고 귀찮아 싫다는 내게 ‘너 닮았어, 임마’ 한다.

 아, 치자 꽃! 하얗게 피어서 노랗게 지는, 그 하얀 꽃송이가 너무나 순수해 보이는 꽃, 달콤한 향기가 달빛 선율 같이 젖어드는 꽃이다.

 친구의 말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설레는 내 가슴은 한 남자의 아내, 두 아들의 어미이기 전에 한 여인임을 확인 시켜 주었다. 하얀 치자 꽃에서 여인의 향기를 느끼며 은근한 마음으로 친구에게 답 글을 보냈다. ‘치자 꽃 한 잎 띄워 술 잔 권하니 이 술잔 받거든 그대 마음일랑 치자 꽃 향으로 띄워 보네소.’ 괜스레 붉어지는 얼굴로 혼자 멋쩍게 웃었다.

 그런데 치자 꽃이 영 낯설지 않았다. 막막한 기다림 속에 기억의 강줄기로 안개가 걷히더니 오랜 기억 하나가 밤하늘의 유성처럼 떨어졌다. 30여 년 전에 잃어버린 약속이 희미한 기억의 바다 속을 유영하며 내 심연을 애타게 더듬었다. 오랜 기다림으로 지친 그림자하나, 열다섯 살 소년은 그 곳에 무채색으로 서 있었다.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눈앞이 아득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지하 동굴로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온 몸으로 한기가 찾아들고 등줄기로 찐득한 땀이 흘러 내렸다.

아! 편지.

그걸 잊고 있었다.

 노도처럼 달려와 바위 한 귀퉁이에, 하얗게 그리움 쏟아놓고 돌아서는, 여름바다 파도처럼 흰 치자 꽃 한 송이, 수줍게 핀 작은 화분만 내 손에 들려주고 그 애는 오던 길 되 돌아 달려갔다. 뒤도 안 돌아 보고 달려가는 그 애의 머리카락은 칠월의 태양아래 은빛으로 날렸다. 그날 오랜 시간 기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동안 열네 살 소녀는 작은 가슴이 떨려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아니, 치자 꽃 사랑의 향기로 배고픈 줄도 몰랐다.

 나는 짧은 기간 광천에서 중학교를 다닌 적이 있다. 그 곳은 남녀 공학이었으며 한 학년에 두개의 학급이 있다. 작은 시골인데다 학생 수도 적었으니 서로에 대해 웬만큼은 다 알고 지낸다. 그 애는 다른 친구들 하고는 잘 어울리고 말도 잘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와 그 애는 말 한마디 해 본 적이 없다. 그저 먼발치서 자주 눈이 마주치는 일 외에는, 그런데 내가 광천을 떠나던 날, 그 애는 꽃 치자 화분을 말없이 내 손에 들려주고 달아났다. 기차가 플랫 홈을 서서히 빠져 나가자 어디 숨어 있었는지 다시 나타나 손을 흔들고 서 있었다. 난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그 애가 보이지 않을 때 까지 고개를 틀어가며 돌아보았다.

 화분 속에는 반듯하게 접혀진 분홍색 쪽지가 있었다. ‘치자 꽃향기 좋지? 편지 해 줄래? 그리고...나, 너 좋아해’ 라고 또박 또박 씌어 있는 글씨들이 내 가슴을 얼마나 떨리게 했던지 나는 누가 볼까봐 고개도 들지 못했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들킬까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그렇게 한참을 꼼짝도 안하고 하얀 치자 꽃만 들여다보았다.

 그날 한 송이 치자 꽃에선 달콤한 사탕냄새가 났었다. 아니 오렌지 향 같은 것이 기차 안을 가득 채웠다. 하얀 꽃잎 속에는 훤칠한 키에 뽀얀 얼굴, 눈이 까만 그 애가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누가 볼세라 살그머니 미소만 지어 보이다 얼른 꽃잎 속으로 꼭꼭 숨었다.

 광천에서 한 정거장 더 가면 대천이다. 기차는 대천의 여름바다를 찾는 사람들로 붐볐다. 대학생들이 방학을 시작해서인지 그날따라 젊은 청년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기차는 어느 덧 대전 역에 도착했다. 치자 꽃 화분을 꼭 안고 기차에서 내리는데 뒤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발을 헛디뎌 나를 붙잡는 바람에 화분을 놓치고 말았다. 나는 기차레일 위로 떨어진 화분을 줍지 못하고 애만 태웠다.

어린 마음 탓이었을까?

 화분을 간직 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내 마음 한번 전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동동거리던 시간들이 세월 속에 어느 덧 잊혀져갔던 것이다.

 혹여, 꽃 치자는 아름답고 향기롭지만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연유로 인한 것은 아니었는지...

 세월은 시간의 기차에 내 모든 걸, 무조건 싣고서 흘러가버리는 무심한 강물이었다. 

 오랜 기다림으로 지쳐갔을 그 애의 모습이 눈앞에 자꾸만 어른거린다. 그 애는 지금 어떻게 변해 있을까? 비록 사이버 공간이지만, 올 여름 나를 찾아 온 치자 꽃은 삼복더위를 잊게 했다. 아니, 느닷없이 다가와 나의 여름을 설레게 한다. 타 오르는 그리움을 찾아 치자 꽃 한 송이 품에 안고 칠월이 다 가기 전에 광천이나 다녀와야 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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