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4차례 1등 공신 한명회, 암행어사 박문수, 실학자 홍대용 미호천 정기받아

⑮내수읍 : 성군 세종의 향기, 그 길을 걷다

권혁상 기자·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 한명회 묘소.

지금은 병천천이라 불리는 물길이 있다. 옛 기록에는 산방천(山方川)·병천(幷川)으로 불리던 목천에서 흘러온 물이다. 지금이야 아우내란 이름이 더 익숙하다. 천안 시내의 물은 아산을 거쳐 서해로 흐른다. 반면 목천·병천의 물은 미호천에 합친다. 한남금북 정맥은 병천천을 통해 숨통이 트인 곳이다. 이 물길을 통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옛 인물을 만난다. 천안시 수신면은 옛 청주 땅이다. 이곳에 조선 전기의 인물,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묘소가 있다.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인물인 만큼 꽤나 익숙하다. 무엇보다 세조의 왕위 찬탈로부터 연산군에 이르는 시기 동안 기록에 빠지지 않던 그였다. 그렇지만 후대 사람들은 그를 옳게 보진 않았던 것 같다. 실제 무오사화 때 그의 무덤이 파헤쳐 관을 훼손하는 형벌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래서인가 웅장한 그의 묘소는 아직까지도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했다.

한명회·홍대용 옛 청주 인물

묘소를 알리는 표석을 지나 새로 지은 사당에 이른다. 사당 뒤쪽에 신도비가 있고 그 뒤 능선에 우람한 문인석이 지키고 있는 한명회의 묘소가 있다. 뒤쪽에 부인 묘소를 두고 그 바깥은 커다란 돌로 둘레를 쌓았다. 우리가 흔히 보지 못하던 구조다. 한명회는 ‘관상’이란 영화에서 베일에 싸인 인물로 그려졌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이렇다 할 벼슬을 얻지 못하던 차에 수양대군을 만나 반전을 이룬다. 신숙주 등과 함께 김종서 등을 몰아낸 계유정란의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 세조의 왕위찬탈을 도와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 남이의 옥사를 처리한 익대공신(翊戴功臣) 1등, 성종 즉위의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 무려 네 차례나 1등 공신이다. 그래서 그를 훈구파의 대표로 꼽는다.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의 세자빈은 일가인 한확의 딸이다. 그가 유명한 인수대비이다.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여인이다. 그러나 의경세자는 결국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일찍 죽자 동생 예종(1468~1469 재위)이 왕위에 오른다. 그 예종의 비가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이다. 예종도 재위 2년만에 세상을 떠나고 의경세자의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른다. 물론 성종의 비도 한명회의 딸 공혜왕후였다. 2대에 걸쳐 자매가 왕비가 된 경우이다. 공혜왕후는 왕자를 낳지 못했고, 폐비로 쫓겨나 사약을 받은 윤씨의 아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다. 비극은 이렇게 시작됐다. 연산군은 왕위에 오른 지 10년(1504), 어머니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많은 관료들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이를 갑자사화라 부른다. 두 딸을 왕비로 삼은 영화는 한순간에 간 데 없고, 이미 죽은 한명회는 부관참시(剖棺斬屍)에 처해진다.

▲ 박문수 초상(보물 1189호 천안박물관 소장)

한명회의 묘소를 나와 병천면 소재지에 이르는 길에 다른 두 사람의 자취가 있다. 병천 북쪽에 탐관오리를 혼낸 암행어사로 알려진 박문수(朴文秀, 1691~1756), 그리고 한명회 묘 가까이에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홍대용(洪大容, 1731~1783). 홍대용의 생가터에는 2014년 천안 홍대용과학관이 들어섰다. 궁벽한 시골 마을에 전위적인 건물이 들어선 연유다. 두 인물은 천안을 대표하는 역사인물이 되었지만, 그때 그들은 청주목 관할의 목천현에 묻히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물길을 따라가면 독립기념관을 만난다. 그곳 가까이에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동녕(李東寧, 1869 ~1940)의 생가가 있다. 그는 10대 시절 문의 후곡리에서 성장한 인물이다. 할아버지에게 배우고 나아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던 그였다. 어찌 보면 이 길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이들이 걷던 길이다.

청주 서쪽에 우뚝 선 동림산

물길은 산을 넘지 못하고 돌아간다. 아우내는 산간 곳곳의 물길이 합쳐 미호천에 들어선다. 미호천으로 경계를 이룬 서쪽에 뾰족하게 동림산(해발 457.3m)이 있고 그곳에 산성이 있다. 산의 이름을 따 동림산성이라 부른다. 이곳 주위의 산줄기는 백두대간이 속리산에서 나뉘어 한남금북정맥을 이룬다. 그 산줄기가 미호천을 끼고 굽이돌아 이곳까지 이른다. 미호천 수계 바깥은 4~500m의 산줄기가 이어지며 한 때는 국가 간 경계를 이룬 적이 있었다. 그 일부는 백제의 경계로서, 또 북으로 향하던 신라가 머물던 곳이었다. 물줄기처럼 지그재그로 이어진 산줄기에 옛 산성이 많다.

▲ 동림산성.

동림산에 오르면 전망이 뛰어나다. 청주 도심은 물론 사방 가리지 않고 멀리 볼 수 있다. 자연 이곳엔 백제와 신라가 산성을 쌓아 그들의 강역을 지켜왔다. 지금 동림산은 천안과 경계를 이루며, 진천에서 나뉜 금북정맥이 남동쪽으로 뻗은 동쪽 끝자락이다. 주변의 물줄기는 동쪽에 남으로 흐르는 아우내가 진목탄에서 미호천과 합치고, 서쪽은 전의에서 모인 조천이 남으로 흘러 미호천과 만난다. 동서, 남북의 옛 길을 여지 없이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물론 동림산 주위의 산자락에는 많은 산성들이 있다. 서쪽으로 망경산성과 운주산성이, 다시 고려산성에서 남으로 산줄기를 따라 증산성 등 좁은 지역에 대여섯의 산성이 자리 한다. 동림산 동쪽은 지난 번에 살펴본 목령산성이 있고, 보다 서쪽으로 장자성을 거쳐 진천·증평 경계의 여러 산성과 만난다. 동림산성을 기준으로 병풍처럼 산성이 펼쳐진다. 둘레 954.6m의 석축 산성. 옥산면 장동리 고개에서 임도를 따라 쉬 오를 수 있다. 꼭대기는 삼태기 모양이나 서쪽으로 길게 성벽이 뻗었다. 최대한 너른 공간을 확보하려던 결과였다. 성벽은 대부분 무너졌지만 곳곳에 자취를 남기고 있다. 성벽은 앞쪽만 돌로 쌓고 뒤는 흙으로 채운 듯 미끄러지듯 흘러내린 성돌이 많다. 가파른 경사에 터를 마련하고 성벽을 쌓았을 옛 사람들의 고충은 무너져 내린 성돌 만큼 허무하다.

▲ 동림산성 성벽.

이곳 동림산 정상은 삼국시대의 경계일 뿐 아니라 최근까지 여러 변화를 그대로 남기고 있다. 정상에 있는 삼중리편입기념비, 1995년 3월 충청남도 연기군에서 세웠다. 원래 청원군 강외면 삼중리에서 연기군으로 편입된 것이다. 연기는 오늘 세종시가 되었으니, 부강을 포함하여 강외도 세종의 일부가 된 셈이다.

다시 땅으로 내려서면 사람들의 터전이다. 전국의 지명 중 많은 것 중 하나가 수락동이다. 한자 표기가 여럿이나 물가에 자리 잡은 공통점이 있다. 사람 사는 곳과 물은 불가분의 관계였나 보다. 우리 지역에는 미원면과 옥산면에 수락동이 있다. 미원면 가양리 수락동은 경주이씨의 보금자리다. 한편 아우내가 흐르는 옥산면 수락리는 문화 류씨의 터전이다. 지명이 말해주듯 살기 좋은 이곳에 일찍부터 유력 가문이 자리 잡았다. 거기에 문화류씨의 입향조인 류소(柳沼)의 묘소가 있다. 류소는 (구)안동김씨 김사렴의 형인 김사겸의 딸에게 장가들며 우리 지역과 인연을 맺었다. 관직에서 물러나 처가인 이곳에 들어와 만년을 보내고, 사후 이곳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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