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저녁약속을 위해 겨울 코트를 꺼내 입었는데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낙엽이 물드는 산자락을 보며 감탄하던 때가 언제였는데... 한치의 어김도 없는 자연의 섭리가 이토록 엄정하다니!
올해는 여느해보다도 출장을 갈 일이 많았다. 사무실을 벗어나 가을걷이가 한창인 시골길을 달리다보면 잊었던 정서가 되살아나고, 나 자신 가을풍경에 동화된 듯 멋스러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자주 시골을 다니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지난 7월쯤 이름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 한 독지가가 소외되고 어려운 노인과 이웃을 위해 써 달라면서 아홉 채의 집을 청주YWCA에 기증하였다. ‘양지뜰‘이라는 예쁜 이름의 청주YWCA 노인의 집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때부터 나는 바빠졌다. 입주 희망 신청서를 받고 방문상담도 하는 등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의 가을 나들이는 자연스레 빈번해 졌다.
어려운 분들이 새 집에서 살 수 있도록 연계시켜드리는 일이라 보람도 있고 신도 났다. 양촌리, 내수, 멀리 옥천에서도 신청을 해주셨다. 일을 처음 시작할 때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 생겨났다. 청주YWCA에서 정한 선정기준에 적합한 분을 찾기가 의외로 힘이 들었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자식이 4남매, 7남매가 되면서도 신청하신 분의 숫자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같은 청주시에 거주하는 자식들이 부모님을 노인의 집에 가시게 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어렵더라도 자식들이 십시일반으로 부모에 대한 도리를 다 해야 할 일이지 당장 아쉽다고 도움을 드리기는 곤란한 노릇이었다.
지금 ‘양지뜰‘에는 손자, 손녀를 돌보는 할머니 3세대가 선정되어 지난 10월 중순부터 입주하여 살고 있다.
예전에 사시던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 전기장판 하나에 의지하여 겨울을 나신다며 “조금이라도 따뜻한 곳으로 옮기고 싶다”는 말씀을 하신 기억이 난다. 섀시까지 잘 되어있는 따뜻한 집에서 할머니들은 남부러울게 없어 보이셨다. 이사하고 며칠동안은 너무 좋으셔서 “이게 꿈인가 생시인갚 잠도 못 이루셨다는 할머니도 계셨다.
‘양지뜰‘에 입주하신 할머니들은 서로 왕래하시며, 내년 봄에는 조그만 텃밭이라도 함께 일구어 상추나 고추라도 따 먹자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셨다. 그때 나도 꼭 부르겠다고 하셔서 “돼지고기는 제가 사 가지고 올게요”하고 약속도 드렸다.
청주로 돌아오는데 저녁바람이 매우 찼다. 찬바람이 부니까 따뜻한 아랫목이 더욱 생각난다. 겨울 채비를 서둘러야 할 때 인 것이다. 어디선가 추위에 떨며 계실 어르신들 생각에 조바심이 난다.
도움이 꼭 필요하신 노인들이 ‘양지뜰‘에 빨리 입주하셔서 따뜻한 겨울을 나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일은 우리 식구들 전부, 내복을 꺼내 입도록 해야겠다.
(청주YWCA 여성상담실 ☎268-3007)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