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 세거지 경주이씨, 고려말 이제현 후손 뿌리내려

⑭오창읍 : 너른 평야, 사람이 북적이다

▲ 청원구 주성동의 주성강당. 청주에 자리 잡은 한산이씨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색(李穡)의 영정을 모신 공간이다. 가까운 내수읍 묵방리에는 한산이씨 묘역이 있다. 최근 이덕수(李德洙)의 신도비를 비롯하여 묘역 일원이 충청북도 기념물이다.

청풍김씨 김윤의 유복자는 우후를 지낸 김숭의(金崇義)다. 그의 딸이 인천채씨 채무이(蔡無易)에게 시집갔다. 채무이가 처가에 들어와 살면서 인천채씨의 청주 세거가 시작되었다. 또 그의 딸이 한산이씨 이덕사(李德泗)에게 시집갔으니, 이제 막 청주에 터를 잡은 한산이씨와 혼맥으로 연결된 셈이다. 나아가 이덕사의 사위는 송시열(宋時烈)이니, 여기에 은진송씨를 보탤 수 있다.

채무이의 현손은 채지홍(蔡之洪, 1683~ 1741)이다. 그는 강문8학사(江門八學士)의 한 분인데, 송시열의 고제 권상하(權尙夏)의 제자이다. 채지홍은 일찍이 진천 문백 봉암으로 옮겨가 학문에 힘쓰고 제자를 길렀다. 제천의 황강(黃江)에 드나들며 스승 권상하에게 배우며 학문의 일가를 이루었다. 지금 진천 봉암에 그를 모셨던 사당의 터가 남아있다. 그리고 그의 묘는 청원구 외남동, 오창과 진천을 바라보는 곳에 있다. 역시 여러 성씨는 (구)안동김씨의 터전에 뿌리 내린 것이다.

▲ 진천 초평의 이대건·이시발 신도비.

노론과 소론 맞선 신항서원

오창 일대에서 옛 기록에 자주 보이는 경주이씨가 있었다. 우리에겐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이시발(李時發)이 잘 알려져있다. 우리 지역의 경주이씨는 대개 익재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후손이다. 그는 고려 말의 인물로 뛰어난 성리학자이며, 정치가로 유명하다. 그의 후손 중 이공린(李公麟, 1437~ 1509)이 청주로 낙향하였다. 이공린은 사육신의 한 명인 박팽년(朴彭年, 1417~1456)의 사위로 벼슬이 막혔다가, 다시 아들 이원(?~1504)로 인해 참화를 겪었다.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로 아들이 참형되고 자신은 해남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풀려났으나 아들을 데리고 청주로 내려온 것이다. 그의 아들들은 학문이 뛰어나 팔별(八鼈)로 불렸다.

이원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넷째 이발(李潑)은 제천에 살던 숙부 이타에게 양자로 보내졌다. 이발과 그의 두 아들 이경윤(李憬胤)·이신윤 형제도 제천에 거주하였다. 이경윤은 자신의 아들들이 제천에서 배울 것이 없다 하여 청주 오근리(梧根里)에 있던 작은할아버지 이잠(李潛)에게 보내어 수학토록 하였다. 이때 이대건(李大建)도 오근리로 옮겨 살면서 호를 오촌(梧村)이라 하였다. 이대건이 오근으로 옮겨온 이유는 이곳이 부인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부인 안동김씨는 김사렴의 후손 김도(金燾)의 딸이다.

▲ 진천 초평의 이대건·이시발 신도비.

또 하나의 성씨가 (구)안동김씨의 터전으로 들어온 셈이다. 그런데 이대건은 불과 25세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이시발은 이대건의 묘를 진천으로 옮겼고 이때부터 경주이씨는 주로 초평에 살았다. 초평은 이시발이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받은 땅이다. 그래서 그들을 초평이씨라 부른다.

이때 이시발의 동생, 이시득(李時得)은 초평으로 가지 않고 문의로 옮겨갔다. 이시득은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냈다. 그의 묘갈은 송준길(宋浚吉)이 찬하였는데, 이때까지 이들은 서인(西人)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런데 이시득의 손자 이인형(李寅馨)·인빈(寅賓) 형제는 신항서원(莘巷書院)을 두고 노론과 대립하였다. 신항서원에 누구를 모시느냐를 두고 향전(鄕戰)이 벌어진 것이다. 이제 우리 지역 경주이씨는 소론으로 드러난 순간이다. 중앙의 붕당정치가 지역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신항서원은 1570년(선조3) 경연(慶延)·박훈(朴薰, 1484~1540)·김정(金淨, 1486~ 1521)·송인수(宋麟壽, 1499~1547)를 제향하기 위해 처음 세웠다. 모신 인물들이 지역의 대표적인 효자와 사화(士禍)로 화를 입은 분들이다. 이후 1642년(인조20) 한충(韓忠, 1486~1521), 1650년(효종1) 송상현(宋象賢)·이득윤(李得胤)을 더불어 제향하였다. 한충 또한 기묘사화와 관련된 인물이고, 송상현은 임진왜란 순절 충신, 이득윤은 지역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다.

그런데 1656년 이이(李珥, 1536~1584)·이색(李穡, 1328~1396)을 모시면서 논란이 시작된 것이다. 물론 1660년(현종1) ‘신항서원’이라 사액을 받을 때까지는 여러 문중이 협력하였다. 그러나 1665년 이이를 제일 위에 따로 모시게 되면서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다. 바로 위차시비라 한다. 이이는 서인-노론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이이를 이색보다 앞에 모시면서 논란이 시작된 것이다.

일찍이 이이와 이색을 모시자는 주장은 충주지씨 지약해(池若海)로부터 시작하였다. 그는 송시열의 외족이며 문인으로 서인-노론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여기에 지역의 다른 성씨가 반발하며 전쟁을 방불케 하는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물론 1685년(숙종11) 송시열이 쓴 묘정비를 세우며 일단락된 듯하다. 그렇지만 이로 인해 지역은 노론과 소론이 완전히 나뉘는 계기가 되었다. 신항서원은 청주를 대표하는 서원이다. 이곳을 둘러싼 논란은 중앙과 연동되어 이루어진 정치의 현장이기도 하였다.

오창의 나루 오근진(梧根津) 지명

지금의 오창은 읍사무소가 있는 구읍과 아파트가 들어선 신 도심으로 나뉜다. 옛 읍소재지는 흔히 오근장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충북선 기차역이 들어선 미호천 남쪽을 오근장이라 한다. 오창의 연원은 오근진(梧根津)이다. 지금의 팔결교에 나라에서 관리하던 나루[津]가 있던 것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오창읍소재지 금정아파트 자리가 옛 북창(北倉), 오근창이라 한다. 나라에서 세곡을 관리하던 곳이다.

국도 17번이 지나는 이 길은 진천과 안성, 용인을 거쳐 서울로 가던 길이었다. 자연 사람과 물자가 모이는 곳이었다. 아파트촌이 보다 서쪽으로 옮겨가 중심을 이루지만 여전히 이 길로 북쪽을 향한다. 백제가 미호천을 지키던 목령산성이 있고, 이 길을 따라 북쪽을 향하던 신라군이 거쳐간 곳이다. 고려 말 조선 초기 청주에 들어온 (구)안동김씨로부터 여러 성씨가 터전을 일구었다. 어쩌면 초라해 보이는 구 읍에서 너른 뜰을 터전으로 삶았던 옛 사람들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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