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 읽기

꽃덤불

신석정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 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거룩한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 보리라.

- <해방기념시집> 1946년

허장무 글·이은정 그림

해방 전야, 이광수는 일어의 국어 상용을 역설하고, 동경 유학생들에게 학도병 자원을 권유하고 다니다가, 지병으로 양주군 사릉에서 칩거하던 중에 해방을 맞지요. 김동인은 황군위문작가단을 구성하여 북지 전선 등을 위문하고, 8월 15일 오전 조선총독부를 찾아가 친일어용 단체 결성을 상의하던 중, 12시 항복 방송을 듣게 됩니다. 안타까운 일은, 성북동 골짜기에 자택 심우장을 지을 때 남쪽으로 총독부가 보인다고 주춧돌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 기어이 북향집을 지은 한용운 선생은 해방 한해 전에 입적합니다. 불굴의 시인 이육사와 윤동주도 북경과 후쿠오카의 감옥에서 해방을 일 년 남짓 남기고 옥사하고 말지요. 똑같이 독립투사 형님을 둔 명문가 출신의 현진건과 이상화, ‘빈처’의 현진건은 동아일보 사회부장 당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살사건을 일으켰고, 이상화는 ‘피압박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며 학교에 권투부를 만들기도 하는데요, 두 사람 나란히 해방 이태 전에 몹쓸 병을 얻어 운명합니다. 그런가하면 이광수가 다닌 학교라고 와세다 대를 피해 게이오 대학을 선택했던 ‘표본실의 청개구리’의 염상섭은 3,1운동 때는 오사카에서 필사한 독립선언문을 뿌리다 구속되기도 하는데, 그 후 평생을 신문기자로 지내면서 하룻저녁 100 잔의 대포를 마시는 대호주가로 당시 유행하던 사회주의에도 굴욕적인 친일의 유혹에도 빠지지 않고 청빈하게 해방을 맞이합니다.

해방, 그 감격의 순간이 도래하자 수많은 시인들이 잃었던 모국어로 환희의 순간을 노래합니다. ‘해방기념시집’이 간행되고 홍명희의 ‘눈물 섞인 노래’, 정지용의 ‘그대들 돌아오시니’, 김달진의 ‘아침’, 김기림의 ‘지혜에게 바치는 노래’, 조지훈의 ‘산상의 노래’ 등 민족의 자유와 영광을 유감없이 표현하지요. 그 중에서 문학성도 돋보이고 주제도 선명한 신석정의 ‘꽃덤불’을 소개합니다.

전원파의 시라고 하기에는 대단히 열정적인 시입니다. 8. 15해방은 유파를 초월하여 모든 시인에게 가슴 벅찬 기쁨이 아닐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기쁨 뒤에는 만만찮은 걱정이 도사리고 있는 듯합니다. 마지막 연에서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지만 ‘다시 우러러 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이 아직도 차거니’라고 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해방 직후의 국내 사정이 그렇게 만만치 않았고, 우리의 주체적 역량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외세에 의해 해방이 이루어진 모순된 상황을 그렇게 표현한 것 갔습니다. 당시로선 상당히 정확한 시대인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시의 가장 사실적인 슬픔은 ‘영영 잃어버린 벗’과 ‘멀리 떠나버린 벗’과 ‘몸을 팔아버린 벗’과 ‘맘을 팔아버린 벗’에 대한 충격적인 아픔이지요. 그러면서도 ‘꽃덤불’로 명명하고 있는 새롭게 건설될 민족국가에 대한 포부와 기대를 강열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광복 70 년입니다. 암흑의 시대로부터 질곡의 70 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미고 겸허히 조국의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향한 확실한 포부를 실현해 나가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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