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호천을 지킨 백제 산성 ‘목령산성’ 둔덕만 남아
배산임수의 기름진 터, 여러 성씨의 세거지로 번성

⑬ 오창읍 : 너른 평야, 사람이 북적이다

선사시대를 지나, 청주 역사는 백제 때 무수한 자취를 남긴다. 와우산성에서 부모산성에 이르는 그 구릉 곳곳에 백제의 숨결이 살아있다. 백제의 자취는 미호천을 넘어 오창과 오송 일대로 이어진다. 청주 도심에서 북쪽, 오창을 둘러싼 산줄기에 목령산이 보인다. 산 꼭대기에 정자를 만들어 멀리서도 그 윤곽이 뚜렷하다. 목령산 꼭대기에는 백제가 쌓은 산성이 있다. 겉은 돌로 쌓고 안은 잔돌과 흙으로 채운 형식이다. 시간이 흘러 대부분의 돌은 흘러내리고 둔덕만 남았다. 마치 말 안장 모양을 닮았다. 목령산 남쪽 자락은 옛 유적으로 넘쳐난다. 오창과 오송에 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발굴조사를 통해 많은 유적을 확인하였다. 가까운 시기의 삶은 물론 그 아래에 백제의 자취, 그리고 더 아래에는 선사시대의 흔적마저 켜켜이 쌓여있다. 예나 지금이나 배산임수(背山臨水)는 삶의 최적지인 셈이다.

▲ 충비 삼월의 비,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4호

고려말 김사렴 안동 김씨 첫 정착

병천천이 미호천에 합류하는 곳을 옛 사람들은 진목탄(眞木灘)이라 불렀다. 이곳에서 미호천 상류로는 드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당연히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김사렴(金士廉, 1335~1405)은 고려 말 널리 알려진 충신이다. (구)안동 김씨로 청주에 처음 들어온 이라 한다. (구)안동 김씨는 김방경(金方慶)을 중시조로 하여 고려 말에 크게 번성하였다. 우리 지역의 (구)안동 김씨는 3세 김영후(金永煦, 1292~1361)의 후손들이 대부분이다. 그의 손자 김사렴은 조선이 건국되자 오창 모정리로 낙향하여 고려에 절의를 지켰다. 반면 동생 익원공(翼元公) 김사형(金士衡, 1341~1407)은 개국공신이니 형제가 다른 길을 간 셈이다.

그와 청주의 인연은 분명치 않다. 다만 고려 말 문벌이라는 권위와 할머니 청주 한씨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김사렴은 6남 1녀를 두었다. 그런데 5남 김약과 6남 김식(金湜)을 제외하면 아들을 낳지 못하거나 출가하였다. 막내 김식과 그의 아들 김자려(金自麗)는 진천 문백에 옮겨 살았다. 김자려의 아들 김린이 진천읍 장관리로 다시 옮겨 오늘에 이른다. 그의 증손 김효건(金孝騫)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고, 그의 후예 중 무신란(戊申亂) 때 김천주(金天柱)·천장(天章) 형제의 분투는 지금도 전해온다. 진천읍 사석리에 김천주 2대 4충신의 충신각이 있다.

▲ 목령산성

지금 청주 지역 (구)안동김씨는 김약의 후손들이다. 김약의 손자 김환(金丸)이 여주로 옮겨갔지만 김환의 손자 김지(1455~1534) 때부터 다시 오창에 세거하였다. 그의 현손 김하서(金河瑞, 1551~1610)는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유명하다. 김지의 아들 김공예(金公藝, 1485~1537)는 작은아버지 김계의 양자로 들어가 청주에 터전을 잡았다. 한편 김사렴의 4남 김제는 아들 없이 딸만 두었다. 그 딸이 전의 이씨 이사혜(李士惠)에게 시집가면서 전의이씨가 청주에 자리 잡았다. 따라서 외손이 제사를 받든다. 이사혜의 아버지는 이정간(李貞幹, 1360~1439)이고, 그의 고모부는 청주 곽씨 곽순(郭恂)이다. 이래저래 청주와 인연이 깊다.

오창읍 양지리의 송천서원(松泉書院)은 이들 성씨들이 실타래처럼 얽혀있다. 송천서원은 1695년(숙종21) 옥산면 환희리 송촌마을에 7분을 모셔 처음 세웠다. 이후 1723년(경종3) 이제신 등 3명을, 1798년(정조22) 남구만 등 4분을 추향하였다. 서원은 1871년(고종8) 훼철된 후 1976년 오창면 양지리 은행정마을에 다시 세우고, 김여량(金汝亮, 1603~1683)을 추향하였다. 처음에는 문중서원으로 출발하였지만, 1723년과 1798년 두 차례 추향한 인물은 대체로 소론에 속한다. 옮겨 세운 송천서원 옆에 전의이씨 사당인 목양사(鶩陽祠)가 있다. 목양사 뒤로는 이정간 등 3대의 단비가 있다.

▲ 송천서원과 목양사

김후, 청풍 김씨 청주 정착 시조

한편 이사혜는 김후(金珝)를 사위로 맞았다. 그는 본관이 청풍으로, 이로 인해 청풍 김씨의 청주 세거가 시작되었다. 김후의 손자는 김윤(金潤)인데 일찍 부모를 여의었다. 이때 노비 삼월(三月)이 주인집 젖먹이인 김윤을 안고 진외가인 오창 양지리로 들어온 것이 계기였다. 김윤 또한 18세에 죽으니 삼월은 유복자를 키워 가문을 잇게 하였다. 청풍 김씨 문중에서는 노비 삼월의 노고를 잊지 않고 1796년(정조 20년) 비를 세워 그 뜻을 기렸다.

청풍 김씨의 뿌리는 괴산군 불정면에 있다. 6세 김관(金灌, ?~1417)의 묘가 최근 충청북도 기념물 제146호로 지정되었다. 그의 네 아들 중 둘째 김의지(金儀之)는 다시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가 김후이다. 첫째 김리(金理)의 5대손 김효백(金孝伯)의 묘가 강내면 탑연리에 있다. 이들은 대대로 무신 가문으로 성장한 듯하며, 김효백의 동생 김인백(金仁伯)의 후예는 대대로 고위 관직을 지냈다. 김인백의 증손 우의정 김구(金構, 1649~1704), 다시 그의 증손 좌의정 김종수(金鍾秀, 1728~1799)가 유명하다. 김효백과 그의 세 아들, 김익후(金益厚)·익성(益聲)·익건(益健)의 묘가 탑연리에 나란하다. 오창읍 양지리와 강내면 탑연리의 세 정려는 청주 지역에 뿌리내린 청풍김씨의 외연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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