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2년 전란중 과거시험 실시, 망선루에 합격자 방 붙여
이인좌의 난 무대가 된 청주읍성,충(忠)과 역(逆)의 갈림길

청주읍성의 단서는 공민왕이 청주에 머물던 때 발견된다. 홍건적을 피해 안동까지 피난했던 왕이 6개월 동안 청주에 머물렀다. 1362년(공민왕11) 9월 21일, 청주 동쪽에 무지개가 떠올랐다. 이때 무지개가 왕궁에 걸쳤는데 양 끝이 청주 내성(內城)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의 내성이 읍성을 말하는 것인지, 와우산의 내성인지 분명치 않다.

이밖에 공민왕이 머물던 자취는 공북루와 망선루에 남아있다. 지금 공북루는 터조차 알 수 없지만 이때 지은 시 29수가 전한다. 또 망선루에는 당시 과거 합격자의 방을 걸었다고 한다. 망선루의 옛 이름은 취경루(聚景樓). 조선초 퇴락한 것을 1461년(세조7) 다시 세우고 편액은 한명회(韓明澮)가 망선루(望僊樓)로 고쳐 썼다고 전한다.

▲ 표충사

지금의 망선루는 제일교회를 새로 지으며 뜯어낸 부재를 이용하여 2000년 다시 지은 것이다. 거의 새로 지은 것으로 원 자리가 아닌 중앙공원 한쪽에 복원하였다. 한 해 두어 차례 행사를 제외하면 누각 출입이 금지된 공간이다. 차라리 시민들의 발길이 직접 닿아 더 친밀하고 소중하게 지켜낼 수 있었으면 한다.

망선루가 있던 제일교회 자리도 본래의 자리는 아니다. 원래는 청주 동헌 객사 동쪽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청주보통학교 교사로 쓰다가 1921년 경찰서 체육관이 들어서며 헐렸다. 이후 1923년 몇몇 선각자에 의해 교회로 옮겨 사학(私學)의 모체로 삼았다. 청남학교와 세광고등학교가 여기서 태어났다.

전쟁은 영웅으로 기록된다

청주옥(淸州獄)과 읍성 성돌을 뽑아다 세운 탑동 양관은 선교사의 주택과 학교 교사였다. 1907년부터 1932년까지 6동의 건물을 완성하였다. 한옥과 양옥을 절충하고 벽돌과 유리, 보일러 등 새로운 문물을 적용하였다. 청주 지역 개신교의 정착과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유산이다. 그런데 양관은 1932년 건축이 마무리된 것이 아니라 1939년 제일교회 예배당으로 연결된다. 지금은 여러 사정으로 종파를 달리하고 각기 다른 학교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제일교회 자리는 옛 지도에서 익숙한 장소다. 바로 중영(中營)이 있던 터다. 국권을 상실한 후 중영 터는 선교사의 차지가 된 것이다. 그래서인가 계몽운동을 제외한 뚜렷한 독립투쟁의 기운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한참이 흐른 후 군사독재에 맞선 민주화운동의 중심으로 자리하였다.

청주읍성은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분명하다. 돌로 쌓은 둘레 1,084보(步)의 읍성. 그리고 1487년(성종18) 5,443척(尺)의 읍성을 다시 쌓았다. 옛 도량형을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대략 1.7km 안팎이다. 여기에 옹성이나 문루가 더해져 약간의 차이가 있으니,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읍성의 윤곽과 비슷하다.

▲ 자혜의원 옛 사진, 읍성을 허문 후 그 바깥으로 물길을 내었다. 그리고 압각수와 멀리 것대산 봉수가 보인다

병영을 옮겨 청주의 가치를 찾다

임진년 4월. 부산 앞바다를 가득 메운 왜선. 그들이 한양을 점령하는데 채 20일이 걸렸다. 파천(播遷), 몽진(蒙塵). 왕이 한양을 떠나는 순간 조선은 없었다. 단지 이름 없는 민초들이 왕 없는 나라를 지킬 뿐이다. 8월 초하루 무심천 건너 산기슭에서 치달은 의승병이 서문으로 돌진하였다. 조헌(趙憲, 1544~1592)이 이끌던 의병과 이보다 앞서 청주를 공략하고 있던 영규(靈圭)의 승병들이다. 조헌은 당초 공주를 거쳐 한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때 영규의 분전과 박우현(朴佑賢의) 전사 소식을 듣고 말머리를 돌려 청주로 향했다.

초하루의 전투는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 날의 전투가 왜군에게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힌 듯 이튿날 왜군은 북문으로 도망하였다. 이 날의 생생함은 중앙공원 한쪽에 서 있는 조헌전장기적비에 자세하다. 조헌은 청주읍성의 승전을 뒤로 한 채 고경명(高敬命)의 뒤를 이어 금산에서 순절하고 말았다. 원래 서문 앞에 세웠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지금도 우리는 청주읍성 탈환을 기념한다. 매년 가을 조헌과 영규, 그리고 순절인을 기리는 제향과 읍성 탈환을 기념하는 축제가 열린다. 여기에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기억이 충돌한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남을 뿐이다.

임진왜란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조정은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왜의 침략에 대비했다. 과거 바닷가 근처를 노략질하던 왜는 이제 더 이상 왜구가 아니었다. 부산에 상륙하여 빠른 길로 한양을 곧바로 쳐들어갔다. 그 길에 청주가 있으니 바닷가를 지키던 병영(兵營)을 이리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1651년). 이제 읍성에는 충청도병마절도사의 병영과 청주목사의 동헌이 함께 자리 하였다. 지금의 중앙공원은 병영, 상당구청 옛 청원군청은 동헌 터였다.

▲ 청녕각 옛 사진

한편 청주에 있던 관찰사영, 곧 감영(監營)은 공주로 옮겨갔다. 행정적 중심에서 군사적 거점으로 바뀐 순간이다. 감영을 공주로 옮긴 이가 괴산 소수에 연고를 둔 유근(柳根, 1549~1627)이다. 읍성 안 병영의 자취는 많지 않다. 병영의 정문인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이 있다. 새로이 보수를 마쳐 동쪽을 향해있다. 양쪽 기둥에 건 주련에, 주군의 군사를 지휘하고[節制州郡兵馬], 남쪽을 누르는 천 길의 구리 기둥[鎭南千丈銅柱]이라 하였다.

앞에서 보면 세 칸인데, 기둥과 초석에 판벽을 세웠던 흔적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청녕각 편액을 달아 혼란이 있었다. 유독 이 건물만 남겨둔 이유가 의문이다. 이외 병영과 관련된 건물은 일체 남아있지 않다. 일제강점기 때의 사진이 남아있는데 기와를 올린 담장을 두른 병영의 모습이다.

무신란(戊申亂), 청주를 뒤흔들다

임진왜란 후 읍성은 통치의 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어찌보면 읍성은 관(官)과 민(民)의 차단벽이었다. 아마 백성들이 느끼는 읍성의 존재는 수탈 자체였을 것이다. 1910년대초 읍성이 헐릴 때 아무런 저항이 없었던 배경은 아닐까.

18세기는 새로운 시기였다. 집권 노론과 반대편에 선 소론과 남인. 이들의 정쟁(政爭)이 극한 대립으로 치닫기 시작하였다. 소론과 남인의 왕, 경종이 4년만에 급서(急逝)하자 노론의 지지를 받던 영조가 왕에 올랐다. 소론과 남인의 위기였다.

한편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서열적 직역 인식이 점차 극복되어 가던 때였다. 특히 정쟁조차 경제적 기반을 필요로 하였다. 장시(場市)가 늘어나고 이를 통해 신분 상승을 꾀하던, 궁극적으로 신분제가 해체되어 가던 시기였다. 단순한 정치적 갈등이 아닌 총체적 변화의 시기였다. 이때 청주 사람 이인좌(李麟佐)는 영조를 부정하며 반란의 기치를 올렸다. 영남의 정희량(鄭希亮)과 호남의 박필현(朴弼顯), 그리고 중앙의 동조 세력을 규합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결국 반란을 실패하고 말았다. 1728년 3월 15일 읍성의 문을 연 양덕부와 죽임을 당한 세 순절인의 이야기는 앞서 살펴본 바 있다. 이때 죽은 이들을 모신 사당이 삼충사(三忠祠), 곧 지금의 표충사(表忠祠)다. 읍성의 북문 안쪽에 세웠던 삼충사는 1939년 개발에 밀려 수동 기슭으로 옮겼다. 기생 끼고 술 먹다 죽었다는 비아냥도 있지만 세 관리의 죽음은 곧 충(忠)으로 살아났다. 그 반대쪽에 죽음이 있었다.

이제 조금씩 밝혀지고 있지만 무신란에는 지역의 유력 인물들이 대거 가담하였다. 반면 의병을 일으켜 진압에 나선 이들도 있었다. 결국 진압에 나섰던 이들이 이후 우리 지역의 주인이 되었다. 당시 14명 충신의 후예들은 오늘도 우리 지역의 유력 가문으로 남아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충과 역(逆)이라는 냉혹한 평가와 함께 살아남은 자들의 역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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