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사회읽기/ Artist 2창수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듯 느끼는 것도 다르다.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하는 명작을 만난 기억 중 최고 중 하나가 모네 그림과의 만남이었다. 거대한 그림이 넓은 곡면에 그려져 있는 지하의 갤러리는 밝은 갤러리 색으로 그림이 오히려 어둡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그림의 거대한 크기로 인해 24m 연작 속에 빠지는 감성을 선사했다. 그림은 두 공간이 공존한 상황을 표현했다. 수면에 비친 하늘, 구름과 수련이 함께 표현되었다. 혼란스러운 공존 공간을 굽은 벽면에 펼쳐놓은 그림으로, 한눈에 그림을 볼 수 있는 거리도 주지 않기에 현재 내가 있는 곳을 기준으로 가늠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수면을 그린 그림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이러한 감정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 Oscar-Claude Monet, Les Nympheas, 1920-1926 Musee de l'Orangerie소장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그의 그림 솜씨를 미리 알아본 아마추어화가 숙모 르카르드는 외젠 부댕(Eugene Boudin)에게 소개를 시켜주었고 부댕은 모네에게 그림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를 화가동료로써 활동을 하도록 도와주었다. 그 중 하나가 자연을 밖에서 보면서 그리라는 것을 주문했는데 당시로써는 일반적이지 않는 방법이었다. 풍경을 그릴 때도 관념적으로 작업실에서 그리던 것이 일반적이었다. 밖에서 그린 덕에 모네는 자연광에서 오는 빛의 산란을 잘 분석하고 빛의 특징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가 참여한 미술운동인 인상주의(Impressionism)는 1874년 루이 르로이 미술평론가가 전시를 보고 비웃는 의미로 ‘참 인상적인 전시였다.’는 평에서, 특히 빛의 변화를 민감하게 표현한 모네의 그림을 비웃으며 평가한 것에서 유래가 되었다. 당시 언론에 기고된 그의 평론 글은 언론과 지식인들이 세상을 이끌지 않는 다는 것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사례로 남겼다.

19세기 유럽은 산업의 성장과 새로운 부를 만들기 위한 제국주의 침략정책을 펼쳤다. 새로운 왕정이 생겼으며 자유로운 사상과 시장 개척을 위한 식민지 건설로 계속되는 전쟁을 겪게 된다. 생물의 진화를 제시한 찰스 다윈의 적자생존원리마저도 전쟁의 중요한 이론적 근거가 되어 식민지건설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모네도 식민지 정책과 관련된 일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알제리에서 군대생활을 한다. 병으로 조기 제대 후 몇 차례 닥쳐오는 전쟁을 피해가며 계속 그림을 그렸고 그의 말년에는 세계1차 대전까지 발생한다. 이러한 전쟁은 모네에게도 삶의 큰 영향을 끼쳤다.

모네는 빛에 심취하여 백내장으로 시력을 거의 잃었지만 시력을 잃으면서 까지도 그린 그의 수련은 그가 보고 싶어 하며 그리려 했던 평화이다. 세상은 분명 공존이 가능하다. 그의 연못은 다른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한다. 혼란스럽더라도 같이 있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시각의 빛을 잃으며 사회에 외친 것은 평화라는 마음의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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