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지인 초청 정치자금 모금차 증평역 광장 연설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진보적 민족주의자', '민주사회주의자', '회색주의자', '실패한 정치인' 등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1886~1947).

좌우익의 극한 대립 구도에서 암살당한 비운의 정치인 여운형은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난 이튿날인 1945년 8월 16일 오후 충북의 신흥 소도시 증평을 방문했다.

송기민(79) 전 증평문화원장은 "여운형씨는 선친 삼형제와 친분이 있었고 나도 서울 계동 집으로 세배를 간 적이 있다"며 "몽양 선생은 소방차를 타고 와서 네거리(현 증평군청 앞 사거리)에서 연설했다"고 회고했다.

송 전 원장은 "몽양 선생은 연설 도중 청년들이 불을 지른 일본신사에서 연기가 치솟는 걸 보고 '그 좋은 나무를 정자로 써도 좋은 재산인데 왜 태워 버리느냐'고 역정을 낸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일본 왕실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모신 일본 신사(神祠)는 여운형이 16일 오후 증평에서 연설하던 중 청년들에 의해 불에 탔다. 이후 1948년 5월 이곳에는 단군전이 건립됐다.

여운형의 증평 방문에 대해서는 단군전 설립자인 고(故) 김기석(1897~1978)씨의 큰아들인 김화삼(82)씨도 증언했다.

김씨는 "당시 증평초등학교 5학년생이었는데 지금 증평농협 하나로마트 앞에서 여운형씨가 소방차를 타고 와서 손을 흔들었다"고 말했다.

여운형이 해방 직후 바쁜 가운데서도 증평을 찾은 이유는 뭘까.

송 전 원장은 "선친 삼형제는 일제강점기에 여운형씨에게 자금을 지원한 적이 있고 이때도 정치자금 모금 차 와서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여운형은 조국이 광복된 그날 정오 일왕이 항복을 공식 발표하기 직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와의 교섭에서 '모든 정치범을 즉각 석방할 것' 등 5개 항의 조건을 전제로 일본인의 안전한 철수를 보장했다.

이날 총독부로부터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받은 여운형은 그날 밤에 자신이 1년 전 결성한 건국동맹을 모체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15일 정오 라디오 방송이 일왕의 항복 방송인 것을 알게 된 시민은 16일 서울 계동 여운형의 집에 몰려가 연설을 요청했고 이날 오후 1시께 여운형은 집 뒤에 있는 휘문중 운동장 연단에 올랐다.

여운형은 이 연설에서 총독부와 합의한 5개 항을 설명한 뒤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기 위해 단결할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연설 도중 '소련군이 서울역에 온다'는 거짓 소문이 나돌면서 연설은 중단됐다.

여운형은 이 연설이 중단된 뒤에 소방차를 타고 증평을 찾았다.

광복 이후 '최초의 정치단체', '한국 현대사 최초로 지방자치를 시행한 조직'으로 8월 말까지 전국에 140여 개 지부가 설립된 건준을 이끌어 가는 데는 적잖은 자금이 필요했을 것이다.

광복 직후의 급박한 정국에서도 여운형은 지방의 한 작은 면(증평은 1949년 8월 13일 읍으로 승격했다) 지역에 급히 내려왔다. 그만한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복 직후부터 여러 차례 정치 테러를 당한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께 서울 혜화동 로터리 부근에서 암살자의 총탄을 맞고 향년 62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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