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의 전략적 요충지, 백제 터전에 통일신라 서원소경 설치
용두사지 철당간 이전 목(木)당간 추정, 주성(舟城)의 돛대 상징

⑪성안동: 준풍(峻豊)에 올린 돛대
권혁상 기자·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 용두사지철당간(1915년 촬영).

청주 외곽을 돌아보고 다시 중심에 섰다. 여전히 옛 읍성 터와 중앙공원 일대는 청주 역사의 중심이다. 청주 역사의 시작은 와우산을 비롯하여 무심천 건너 부모산과 그 자락의 너른 구릉에서 시작한다. 최근 청주테크노폴리스 부지 지표조사에서 발견된 옛 백제 마을은 4백 년 백제 역사의 터전으로 손색없다. 여기서 대를 이어 산 백제 사람들은 미호천과 무심천, 그리고 주변에 솟은 산자락에 기대어 살았다. 산성을 쌓고 무덤을 만들고, 그렇게 수백 년을 살아온 것이다.

그 사이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물리쳤고, 다시 이 땅의 주인은 신라로 바뀌었다. 신라가 문의 양성산성을 쌓은 474년 이후 언제 쯤인가 신라는 청주에 들어섰다. 그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하지만 늦어도 6세기 중엽, 신라 진흥왕이 영토를 크게 넓히던 그 즈음 청주도 신라 땅이 되었다. 청주를 차지한 신라. 그들은 우선 부모산에 백제성을 헐고 그들의 석축 산성을 다시 쌓았다. 그게 지금까지 남아있는 부모산성이다. 이때 신라는 저 멀리 한강 유역에서 고구려와, 다시 금강을 경계로 백제와 크게 다투고 있었다. 따라서 청주는 잠깐의 공백을 갖게 된다. 7세기 후반 삼국 통합을 마무리한 후 신라는 청주의 가치에 주목한다. 예로부터 백제의 군사적 요충이라는 점, 그리고 사방으로 뻗은 물길과 산길의 갈래 길이 시작된다는 점 등. 청주는 옛 백제 지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요충이었다. 이곳에 신라는 소경(小京)을 둔다. 685년(신문왕5) 서원소경(西原小京)의 설치.

▲ 용두사지철당간의 간공.

서원소경은 어떤 모습일까

흔히 말하는 5소경은 한 번에 설치한 것이 아니었다. 557년(진흥왕18) 국원소경, 678년(문무왕18) 북원소경, 680년 금관소경, 그리고 685년 서원소경과 남원소경을 두어 5소경 체제를 마무리하였다. 충주에 둔 국원소경은 고구려를 의식한 결과였으며, 북원소경과 함께 북으로 향하는 교통로의 거점이었다. 금관소경은 당시 신라를 위해 최전선을 누비던 김유신 3대와 남해안 교통로를 염두에 둔 결과였다. 그리고 청주와 남원에 따로 소경을 두어 옛 백제 지역을 아울렀다.

청주는 서해안을 거쳐 당(唐)으로 가는 길이자, 백제의 옛 서울인 웅진과 사비를 겨냥할 수 있는 곳이었다. 서원소경 설치 4년 후 청주에 성을 축조했다. 689년 쌓은 것으로 기록된 서원경성, 혹은 서원술성(西原述城)은 어디일까? 기록 속의 두 성을 다른 곳으로 보기도 하지만 서원술성의 축성 시기가 분명치 않다. 따라서 분명한 근거가 나오기 이전에는 하나의 성을 달리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서원소경이 설치된 직후 청주에 쌓은 성은 어디일까?

▲ 남석교(1915년 촬영).

가장 유력한 곳은 상당산성이다. 최근 산성 안쪽 운주헌(運籌軒) 터를 발굴조사 했는데 그곳에서 통일신라 때의 자취와 유물을 찾았다. 따라서 689년 쌓은 서원술성·서원경성은 상당산성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특히 이때는 676년 당나라 군대를 밀어내고 비로소 삼국 통합을 이룬 직후였다. 언제든 당의 침입이 걱정되고, 한편으론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이 부흥을 꿈꾸던 때였다.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서원술성·서원경성이 지금과 같은 둘레 4.2km의 돌로 쌓은 상당산성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렇지만 적어도 기록 속의 고상당성 혹은 상령산성(上嶺山城)처럼문헌에 자취가 남아있다.

성안길의 옛 용두사 터

770년 신라 혜공왕(惠恭王)은 넉 달 가까이 청주에 머물렀다. 그런데 혜공왕이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신라 하대(下代)의 시작이다. 이제 왕위는 힘 센 진골 귀족의 차지가 되는 혼란의 시기였다. 혜공왕마저 선덕왕(宣德王)으로 즉위한 김양상(金良相)에게 살해되었다.

이처럼 혼돈의 시기에 혜공왕은 왕궁을 비우고 왜 청주에 머물렀을까. 이유를 밝힐 아무런 근거자료도 없다. 다만 그 궁금증은 청주에서 퍼즐을 맞추듯 찾아야 한다. 8세기 후반 경주 바깥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미륵 세상을 설파하던 진표(眞表)의 활동. 그리고 왕권을 차지하기 위한 진골귀족들의 암투. 어느 것 하나 안팎의 도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삼국 통합 직후의 힘찬 기운은 간 데 없고 왕의 안위를 걱정해야 했던 때였다. 그런 왕이 청주에 꽤 오래 머물렀던 것이다.

도심 속 신라의 옛 자취는 고려와 조선을 지나며 희미해져 갔다. 몇몇 유물들이 편린처럼 남아있을 뿐이다. 불교의 시대, 곳곳에 남아있는 자취를 찾아보자. 그런데 유독 우리 지역에는 손가락을 쥔 부처가 많다. 비로자나불이라 한다. 안심사, 용암사, 청화사, 동화사…. 언뜻 꼽아도 적지 않다. 오죽했으면 정하동 길가의 마애불 조차 비로자나불을 새겼을까.

▲ 정하동 마애비로자나불좌상.

<화엄경>에서 큰 부처인 비로자나불은 헤아릴 수 없는 모습으로 대중을 제도한다. 광명(光明)의 부처, 깨달음의 부처는 현실에서 왕이 닮고 싶은 부처였다. 안팎의 위기에 맞닥뜨린 왕에게 비로자나불은 구원이자 나아갈 길이었다. 우리 지역에 갑작스레 비로자나불이 늘어난 이유를 알 것 같다. 지권인(智拳印)의 부처를 떠올리며 다시 성안길을 찾는다. 예로부터 청주를 주성(舟城)이라 하였는데 읍성을 배에 비유하였다. 그리고 용두사 철당간은 돛대였다. 철당간은 준풍(峻豊) 3년, 962년(광종13)에 세웠다 한다. 쇠로 된 당간과 당간기(幢竿記)는 국보로서의 가치를 말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좌우 돌기둥인 지주의 모양이 다르다. 하나는 당간을 고정하기 위한 간공(杆孔)이 있고 다른 것은 없다. 게다가 간공이 뚫린 지주 하나는 뉘어 바닥 받침으로 쓰고 있다. 간공이 뚫린 돌기둥은 철당간 이전의 것들이다. 곧 962년 쇠로 만든 당간 이전에 다른 재질의 당간이 있었다는 뜻이다.

아마도 나무로 만든 당간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나무 당간과 지주는 언제 만들었을까? 962년 이전인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용두사는 적어도 962년 이전에 세운 절이다. 그럼 다시 용두사를 그려보자. 당간은 절 입구에 세운다. 그리고 옛 읍성 윤곽에서 도청 쪽으로 치우쳐 절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절 입구에 높게 올린 당간. 나무 당간이라 하면 국립대구박물관에 전시된 용머리 장식을 올려보자. 입 아래 도르래까지 만들어 당(幢)을 올렸었다. 일주문과 중문을 지나면 저만치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 또는 비로전이 있고 그 뒤로 강당을 두었을 것이다. 물론 대적광전 앞에는 석탑을 모셨을 것이다. 탑동 오층석탑 정도면 그럴 듯하다.

따라서 962년 이전 당간이 있는 절터가 청주 시내에 있었다. 앞쪽에 남석교를 둔 상당한 규모의 절터였을 것이다. 실제 지금의 CGV영화관 자리에서 신라 말의 해무리굽 청자가 나온 적이 있다. 상당산성에 머물던 신라 사람들이 이제 평지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곳에 용두사를 세워 왕권을 회복하고 옛 영화를 꿈꾸었는지 모른다. 새로운 도시가 만들어지고, 그 중심에 용두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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